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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플러스] 순탄치 않은 내리막길…시험대 오른 ‘무티 리더십’
코로나19 장기화로 공중 보건 위기 대응 ‘흔들’
갈팡질팡 방역 조치·마스크 스캔들 등 잇따른 악재에 발목
9월 정계 은퇴 앞두고 집권당 지지율 감소
유럽 정가, ‘포스트 메르켈 시대’ 우려 확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16개 주총리와의 화상회의 관련 언론 브리핑을 마친 후 마스크를 다시 착용하고 있다. [로이터]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오랜기간 유럽연합(EU)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자리를 지켜온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오는 9월 권좌에서 물러난다. 지난 2005년 동독 출신의 여성이자, 이공계 출신이라는 최초의 타이틀을 휩쓸며 독일 총리의 자리에 오른지 꼭 16년 만이다. 4년 전 변함없이 굳건한 지지율을 바탕으로 4선에 성공, 집권 연장에 길을 열었던 그는 이듬해 “어떤 정치적 자리도 맡지 않겠다”면서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할 것임을 선언했다.

세계 자유주의와 연대의 상징이었고, EU와 글로벌 위기의 순간마다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던 그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굵직한 위기의 선봉에는 늘 메르켈 총리가 있었고, 유럽은 메르켈식 ‘무티(Mutti, 엄마) 리더십’ 아래에서 단결했다.

일찍이 메르켈 총리의 정계 은퇴 예고 이후 그가 없는 유럽 정치는 곧장 위기에 빠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쏟아졌는데, 이 역시 글로벌 리더십의 한 축으로써 그가 맡았던 역할의 크기가 ‘공백의 위기’를 예상할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위기는 임기를 6개월 채 남겨두지 않은 메르켈 총리, 그 자신에게 먼저 찾아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라는 전례없는 공중 보건 위기와 최근 이에 대한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메르켈 총리에 대한 국민 불신을 키웠고, 여기에 ‘마스크 스캔들’과 집권당 지방선거 패배라는 악재들이 연이어 터지면서다.

모든 위기에 맞서 냉정하고 해결지향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은 임기 말 뜻밖의 시험대에 올랐다.뉴욕타임스(NYT)는 “메르켈이 임기 막바지에 (코로나19 사태 해결이라는) 가장 큰 도전에 직면했다”면서 “어떤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이지만,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에는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난 3일(현지시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본떠 만든 마스크를 쓴 한 남성이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로이터]

▶갈팡질팡 위기 대응…뒤돌아선 獨 민심= 코로나19 대유행 초기, 메르켈 총리는 당시 다른 강대국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리더십으로 세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는 직접 대중 앞에 서서 코로나19 사태의 현황과 심각성을 알렸고, 코로나19 검사 및 감염자 접촉 추적에 속도를 올리는 등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은 같은 시기 코로나19 상황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등 일부 지도자들이 모습과 분명히 대조됐다.

리더십에 빨간불이 켜진 것은 코로나19 3차 유행이 본격화된 지난 3월 밝혀진 ‘마스크 스캔들’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집권 기독민주당(CDU, 기민당)의 정치인들이 정부의 마스크 조달 사업에 개입, 업체로부터 부당 이익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옌스 슈판 독일 보건부 장관의 동성 배우자가 소속된 회사가 정부에 마스크를 납품한 사실까지 확인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기민당 하원의원 3명이 사퇴했다.

독일 국민들은 즉시 스캔들로 얼룩진 집권당을 심판했다. 기민당은 같은달 중순 바덴뷔르템베르크주와 라인란트팔츠주 등 두 지역에서 실시된 주의회 선거에서 참패했다. 현지 언론들은 기민당의 득표율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시기 메르켈 정부에 코로나19 3차 유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백신 접종은 더디게 이뤄지고 있는 데다, 수 개월 간의 봉쇄 조치에도 독일의 코로나19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방역 대응은 국민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지난달 말 메르켈 총리는 연방정부와 16개 주총리 회의에서 부활절까지 완전 봉쇄조치를 시행키로 했다고 밝혔으나 이틀만에 이를 뒤집으면서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덕분에 집권 기민당은 지방선거 참패 이후에도 지지율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달 1일 발표된 독일의 여론조사기관 인프라테스트 디맵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메르켈 정부의 국정 지지율은 35%에 그쳤다. 코로나19에 대한 정부 대응과 관련해서는 응답자의 19%만이 ‘만족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같은 조사에서 기록한 60%와 비교해 크게 낮아진 수치다.

텔레그래프는 “숙련된 위기 관리자로서 메르켈의 명성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면서 “전염병에 대한 독일 정부의 무능한 대응이 계속된다면 메르켈이 재임동안 만들어낸 안정마저도 훼손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9월 선거 결과도 불투명…차기 독일 총리 누가 될까= 오는 9월 선거에서 집권 기민당이 총리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독일은 9월 26일 연방하원 선거를 치른다. 새 연방하원은 16년 만에 메르켈 총리를 이을 새로운 총리를 선출할 예정이다.

현재 보수진영에서는 현 노트라인 베스트팔렌주 총리인 아르민 라셰트와 바이에른주에서만 활동하는 기민당의 자매 정당인 기독교사회연합(CSU, 기사당) 대표인 마르쿠스 죄더가 강력한 총리 후보다.

라셰트 주 총리는 지난 1월 진행된 기민당 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 단숨에 메르켈 총리의 후임 1순위에 올랐다. 하지만 기민당이 최근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낮은 지지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다, 실용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면서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죄더 대표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발발 후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는 등 중도적인 노선을 펼치는 라셰트와 비교되며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높이고 있다. 그는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오스트리아 국경을 폐쇄하고, 감염 위기에 처한 체코를 돕기 위해 백신을 보내는 등 적극적 행보로 주목받았다. 보수 연합은 올 봄이 가기 전에 투표를 통해 차기 총리 후보를 선출할 계획이다.

문제는 보수 연합에 대한 지지율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보수 연합이 최근 부상하고 있는 녹색당을 끌어안음으로써 ‘블랙-그린’ 연합을 구축할 가능성을 높게 거론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독일 RTL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보수 진영의 지지율은 27%에 그친 반면, 녹색당은 최근 1년여 만에 가장 높은 2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지난해 7월 20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왼쪽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튿날 EU 27개 회원국 정상들은 메르켈 총리가 주도한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지급안에 합의했다. [AP]

▶‘메르켈 없는’ 유럽, 무티 공백 메울 수 있을까= 유럽 정가는 메르켈 총리의 불안한 임기 말 상황과 여전히 혼란에 빠진 ‘후임 구도’와는 별개로 이미 ‘메르켈 없는 유럽’에 대한 걱정과 우려로 가득 차있다.

현재로서는 3자 연합 등의 방법으로 보수 진영에서 독일의 차기 총리가 나와 메르켈 총리의 정책을 계승, ‘포스트 메르켈 시대’를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독일이 현재의 친 EU 기조와 더불어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외교에 있어서는 평화주의를 고수할 것이란 전망과 직결된다. 문제는 현재 메르켈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되는 후보들이 모두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한데다가, 유례없는 연정을 앞두고 있어 대외 문제보다는 국내 정치에만 몰두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때문에 유럽은 단순히 독일의 총리가 아닌 ‘유럽의 지도자’로서 메르켈 총리의 존재감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한 현지 매체는 “EU의 분열 속에도 메르켈은 신뢰와 합리성, 안정을 바탕으로 EU의 기둥 역할을 도맡아왔다”면서 “메르켈의 퇴진은 수 많은 EU의 입장에서 수 없는 불확실성이 생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당장 일각에서는 메르켈 총리의 주도 하에 지난해 7월 27개 회원국 정상들이 합의한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지급에 제동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회복 기금이 원활히 이행될지도 문제지만, 자칫 지지부진한 기금 운영이 장기적으로 유로존의 생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메르켈 총리와 보조를 맞추면서 또다른 EU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혼자 제 몫을 다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메르켈 총리와 달리 마크롱 대통령은 EU라는 연합체에 대한 개혁 의지가 강하다.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마크롱은 EU의 단결을 높이는 데 덜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마크롱이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메르켈과 같은 강력한 파트너가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타임지는 “메르켈의 은퇴는 마크롱이 유럽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는 곧 EU 내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회의감의 확대되고, 터키 등 극우 정권과의 대립 관계가 심화되며 중동 및 아프리카에 대한 개입주의적 접근법이 강화되는 등 중대한 변화가 생길 것임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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