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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땅을 지켜준 '언니들', 초상으로 되살아나다
학고재갤러리, 윤석남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여성독립운동가 14인 초상, 사진+상상으로 복원
"앞으로 100인까지 작업…힘 닿는데 까지 그린다"
윤석남, 김마리아 초상, 2020, 한지 위에 분채, 210x94cm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는 남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마리아·1892~1944)

너는 왜 반동분자로 사느냐고 법대 위의 판사가 을러도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답했다.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마리아의 일화다. 지난 20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정부는 독립운동가,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를 본격적으로 조명했다. 이를 계기로 훈장에 추서된 여성 운동가는 170여명에서 470여명으로 늘었다. 그럼에도 전체 1만5825명 중 3%에 불과하다.

분명 존재했지만, 기록은 없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전시가 열린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는 아시아 여성주의 미술의 지침목 윤석남(82)의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를 개최한다. 말 그대로 싸우는 여자들, 독립운동가들의 인물화다.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14인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다.

사진 기록에 근거해 그려야 하지만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소설가 김이경이 힘을 더했다. 당시의 자료를 모으고 읽고, 그들의 삶을 복기했다. 작업을 시작할 때 "당시 여자는 인간으로 대접도 못받았을 시기인데, 어떻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독립운동 참여로 비로소 존재감을 찾았고, 민족의 일원으로 자긍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윤석남 작가는 이들의 일대기를 연구하고 공부하며,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초상으로 살려냈다.

윤석남, 박자혜 초상, 2020, 한지 위에 분채, 210x94cm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김마리아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가수처럼 '러브(사랑)'와 '샤카(안녕)' 손동작을 취했고, 모진 고문 끝에 먼저 사망한 남편 신채호의 유골을 끌어 안고 걸어가는 박자혜(1895~1943)는 앙다문 이와 꾹 다문 입술, 눈물을 삼키며 분노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불법임금 삭감과 해고에 반대해 을밀대 지붕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인 강주룡(1901~1932)은 노련한 투쟁가의 모습으로, 갓 스물의 나이에 독립자금을 숨겨 홀로 상하이로 넘어간 정정화(1900~1991)는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깡이 담담한 표정과 올곧게 앉은 자세에서 드러난다.

이외에도 우리에게 영화 암살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남자현(1872~1993), 한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 권기옥(1901~1988)도 눈길을 끈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붉은 방'이 마련됐다. '핑크 룸'(1996~2018), '블루 룸'(2010~2018)에 이은 시리즈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피와 열망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사용했다. 종이 콜라주 850점과 거울, 50여개의 여성운동가 초상을 나무 조각으로 표현했다. 억울하고 분노에 찬 표정이 아닌 모두 편안한 모습이다. 이 땅을 지켜준 '언니들'에 대한 추모다.

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앞으로 100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초상을 그리겠다고 했다. "100년전 이들의 투쟁사가 나를 무겁게 눌러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들에 의지해 꿋꿋이 버텼다" 여자들의 역사를 여자가 여성의 시선으로 살려낸다. 굳이 여성주의에 방점을 찍지 않더라도, 지워져버린 아픈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전시다. 4월 3일까지.

vicky@heraldcorp.com

윤석남, 붉은 방, 2021, 혼합매체, 가변크기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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