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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나의 은밀한 욕망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게 생긴 변화. 청소나 신발장 정리 같은 집안일에 공을 들이게 돼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청소를 요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세탁기도 거의 매일 돌린다.

최강한파를 깜박 잊고 세탁기를 돌렸는데 좀 돌아가더니 멈췄다. 배수 호스가 얼어 터졌는지 배수가 안 돼 침대 시트를 빨지 못했다. 그제는 싱크대와 세면대 수도가 얼어붙어, 관리실 기사가 시키는 대로 수도꼭지를 계속 다 열어놓았더니 곧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난방은 고장나지 않았다.

따뜻한 집에서 가만히 ‘방 콕’하고 책을 보든가 텔레비젼을 켜지, 왜 자꾸 안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하며 가구들을 노려보나.

내 눈에 거슬리는 3단 책장을 처분하고 싶어, 벌써 두어 달 전부터 이리저리 궁리하느라 잠을 설쳤다.

합판 책장이 높지는 않지만 옆으로 벌어져 괜히 자리만 차지해. 너 때문에 소파를 들여놓지 못하잖아. 책장을 버리려면 먼저 책을 정리해야 한다.

쓱 둘러보니 크게 아까운 책은 없다. 대개 미술서적과 역사책 그리고 1년에 한 번도 들추지 않는 불어사전, 독어사전, 한자옥편. 웬 영한사전이 이리 많나. 내게 “직업이 번역가시냐”고 묻던 이삿짐 아저씨도 있었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며 사전을 펼치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깝다. 나는 책 욕심이 없어 이사할 때마다 중고책방이나 친구들에게 책을 줘버려, 나중에 글을 쓸 때 내가 읽었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은데 책이 없어서 책장을 뒤지다 결국 다시 산 적도 있다.

외국어 사전들을 여태 껴안고 사는 걸 보면 내게 외국어에 대한 애정이 깊나? 외국어가 아니라 외국에 대한 집착 아닐까.

지겨워하면서도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한 나.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여 멀리 가지 못하니 가까운 집이라도 바꾸고 싶어, 가구 배치를 다시 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무거운 장롱을 옮기지 못해 친구들을 부르고 생난리를 쳤다.

나는 내가 사는 공간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6개월에 한 번 집을 바꾸든가, 그게 안 되면 가구와 인테리어라도 바꾸고 싶다. 내겐 새 옷을 입고 싶은 욕망보다 새로운 곳에 살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잠자리에 들며 나는 꿈꾼다. 북극한파에도 수도가 얼어 터지거나 세탁기가 고장나지 않게 집 안에 세탁기가 있고 붙박이 장롱에 가구는 최소한으로, 침대와 책상 그리고 소파만 들여놓고 우아하게 살고 싶어.

토요일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프랑스 텔레비전 TV5Monde에서 방영하는 ‘라메종 (La maison)’을 보려고 약속을 잡지 않고 점심도 집에서 해결한다.

프랑스의 오래된 마을과 새로 단장한 집들, 건축과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그곳에 사는 장인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그 아름다움에 중독돼 토요일마다 본방사수! 월요일 저녁에 재방송도 놓치지 않으려고 휴대전화 달력에 표시해뒀다.

그처럼 멋진 곳에 살지는 못하더라도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이 기분을 누가 알아주든 말든. 네까짓 게 참나무로 만든 싱크대며 벤치가 놓인 현관이 가당키나 하나. 누가 비웃을지라도 꿈이라도 예쁘게 꾸고 살자.

최영미 시인, 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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