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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의 존재와 정체성, 가능성에 대한 탐구
수원시립미술관 ‘내 나니 여자라,’展
1000에서 딱 1이 모자라다. 999개의 여성상이 모였다. 이미 완성체이건만 늘 불완전하다고 평가되는 여성들을 은유한다. 윤석남, 빛의 파종-999, 전시전경. [헤럴드DB]

“전일 일야(一夜)에 선인께서 흑룡(黑龍)이 선비 계신 방 반자에 서림을 꿈에 보아 계시더니 내 나니 여자라, 몽조(夢兆)에 합(合)지 않음을 의심하시더라 하며, 조고 정한공께서 친히 임하여 보시고 “비록 여자나 범아(凡兒)와 다르다.” 기애(奇愛)하시더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흑룡이 꿈에 나타나 장차 나라의 재목이 될 남자아이인줄 알았으나, 태어난 아이는 여자였다. 가족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내 나니 여자라,’(내가 태어나보니 여자더라)며 자신의 탄생부터 ‘실망’속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매개로 여성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전시가 열린다. 수원시립미술관(관장 김진엽)은 개관 5주년 기념전 ‘내 나니 여자라,’를 개최한다. 강애란, 나혜석, 슬기와 민, 오화진, 윤석남, 이미래, 이순종, 이슬기, 이은새, 임민욱, 장혜홍, 제인진 카이젠 & 거스톤 손딩 퀑, 조혜진 등 13인(팀)의 작가 작품 48점이 소개된다.

전시는 크게 ‘내 나니 여자라,’, ‘피를 울어 이리 기록하나,’, ‘나 아니면 또 누가,’ 등 3개 세션으로 나뉜다. 숨겨지고 흩어진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 여성이라는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전시에 소환된 여성들은 기존의 여성성을 거부한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거목 윤석남(81)은 ‘빛의 파종-999’에서 완전한 수인 1000에서 1이 부족한 999명의 여성을 소환한다. 하나같이 화려한 색으로 꾸며진 목각은 그만큼 다채로운 여성들이지만 1이 부족해 여전히 ‘불완전 하다’고 평가됨을 꼬집는다. ‘우리는 모계가족’에서는 할머니-어머니-나로 이어지는 모계가족을 통해 부계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은새 작가는 ‘밤의 괴물들’연작에서 술에 취한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거대하고 우람하며, 겁이 없이 밤길을 활보하는 여성들이다. 수동적이고 대상화 되는 여성은 찾아 볼 수 없다.

수원 출신의 한국 첫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작품은 그가 연재한 삽화가 나왔다. 밤 12시까지 독서를 하며, 바느질 등 집안일을 하면서도 새벽까지 원고를 작성하는 일화를 소개하며 구한말 여성의 상황을 가감없이 전달한다. 임민욱은 영상작업 ‘봉긋한 시간’과 설치작 ‘솔기’를 통해 삶의 근원적 허무함에 대한 성찰을 이어간다.

남성중심의 사회,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은 그 자체로도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나 ‘현재’와의 만남은 아쉽다. ‘한중록’이 나온 시기와 동시대 여성의 삶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지금 2020년의 대한민국 여성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N번방, 미투 등 거의 날마다 미디어에 도배되다시피 하는 사건을 보면 ‘피를 울어 기록함’이 이시대에도 변치 않은 명제임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다.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이어진다. 이한빛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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