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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바로보기] 포스트 아베시대 관전법

30여년간 일본 현장을 취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2000년대 중반 만난 사카이시의 ‘칼 장인’이었다. 사카이에는 세계적인 주방용 칼 메이커가 많다. 연일 35도가 넘는 한여름 폭염 속에 70대 아버지와 40대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벌겋게 단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들 부자에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왜 힘든 일을 계속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라서”라고 답했다. 아들 대답도 비슷했다. “가업을 잇고 싶어 배우고 있다.”

일본 제조 대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은 1980~90년대 전성기보다 크게 떨어졌다. 반면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으로 대표되는 기초 산업은 ‘모노즈쿠리’ 덕분에 세계 최고 수준을 지키고 있다. 모노즈쿠리는 고도의 기능과 노하우를 가진 장인들이 혼을 담아 제품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대를 잇는 장수 중소기업들이 일본 경제의 버팀목이다.

자영업도 부모 직업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전국 곳곳에서 부모가 운영하던 매장을 물려받은 점주를 여럿 봤다. 오래된 스시(초밥), 라면, 우동 맛집이나 동네 목욕탕, 잡화점에서 노인과 젊은 자식 부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흔한 풍경이다.

농업, 임업, 축산업, 어업 등 1차 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 향토 업종에서 가업을 전수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관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NHK 등 방송과 신문들은 전통 산업을 이어가는 보통 사람의 삶을 멋지게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을 늘 내보낸다. 가업을 전수받아 70, 80대까지 일하고 소박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상류층에도 직업 세습이 흔하다. 의사, 교수, 법률가 등 전문직과 고위 관료, 정치인 등 권력층도 대를 잇는다. 인기 업종인 의사의 경우 부모 직업이 의사이면, 일반 학생보다 쉽게 명문대 의대로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주요 사립대의 경우 대학 부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중·고등학교를 거쳐 의대까지 진학할 수 있다.

최고 권력 기구인 국회에도 세습의원들이 수두룩하다. 2020년 현재 국회에서 ‘세습 의원’으로 분류되는 국회의원이 전체 의원의 약 25%에 달한다. 8년여간 장기 집권을 하고 물러나는 아베 신조 총리가 대표적인 세습 정치인이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와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는 총리였다. 조부인 아베 칸은 중의원 의원, 부친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을 지냈다.

일본 사회의 강점은 ‘안정’이다. 웬만한 자연재해, 정치·사회적 충격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와 현직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이 일본에 변화를 몰고 올까. 그런 면에서 오는 14일 예정된 보수 집권당인 자민당의 총재 선거 결과가 주목된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3인이 출사표를 던졌다. 현지 언론은 다수 파벌의 지지를 받는 스가의 압승을 예상한다. 그는 도호쿠(동북) 지역 빈농 출신으로 야간 대학을 졸업한 흙수저다. 일본에 새 바람이 불어올지 자못 궁금하다.

최인한 시사아카데미 일본경제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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