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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사 한 줄 없는 격정 드라마 ‘오네긴’

‘오네긴’은 푸쉬킨의 운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불린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대사 한 마디 없었지만, 무대는 한 편의 ‘격정 드라마’였다. 몸짓이 된 언어는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든 순간의 감정을 담아낸 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했다. 상투적 수사일지라도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다.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불리는 ‘오네긴’이다.

‘오네긴’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했다. 9년에 걸쳐 완성한 푸시킨의 이 소설은 푸시킨 삶의 데자뷔이기도 하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전막 발레를 무대에 올렸다. 관객들이 코로나19 이후 발레 공연을 만나는 것도 이 작품이 처음이다. 2009년 국내 초연 이후 올해로 다섯 번째 선보이는 이번 작품을 만나기 위해 지난 23일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이 빗길을 뚫고 충무아트센터를 찾았다.

1막은 세상에 둘도 없을 ‘나쁜 남자’ 오네긴과 그를 사랑하는 순수한 시골 여인 타티아나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배경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시골 마을. 운명 같은 사랑을 꿈꾸는 타티아나는 여동생 올가의 연인 렌스키가 데려온 도시 귀족 오네긴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다. 세상만사가 따분한 데다, 오만방자한 바람둥이 오네긴을 ‘운명의 단짝’으로 품은 타티아나는 사랑의 경험은 없으면서, 동화 속 ’러브 스토리‘를 꿈꾸는 순진무구하고 선한 아가씨다. 두 사람의 비극의 씨앗은 첫 만남에서부터 뿌려졌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만남, 속없이 피어나는 타티아나의 감정과 함께 작품은 예열을 시작한다. 1막은 화려한 명장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모든 무용수가 빠른 음악에 맞춰 다리를 벌려 도약하는 ‘그랑제떼’.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오차 없이 어우러져 같은 높이와 간격으로 점프를 선보이는 이 장면에서 관객들의 박수는 절로 나온다.

생일파티 장면에서 시작하는 2막부터 ‘오네긴’은 급전개를 휘몰아친다. 만약 오네긴이 주말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국민 욕받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제멋대로 구는 오네긴은 시종 하품을 하며 파티의 따분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타티아나와 춤을 추면서도 지루하다는 듯 상대를 무성의하게 대한다. 내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턱을 치켜든 모습은 오네긴이 얼마나 거만한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결정적 장면’들도 나온다. 타티아나가 밤새워 쓴 편지를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상처입은 사랑에 눈물을 흘리는 타티아나의 손에 편지를 갈갈이 찢어버린다. 그러고는 금세 타티아나의 동생이자 자신의 친구인 렌스키의 연인 올가를 희롱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시작한 행동들이다. 춤을 추며 올가의 목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등 오네긴의 섬세한 연기와 과장된 표정, 렌스키의 분노는 대사가 없어도 표정과 행동으로 충분히 설명이 됐다. 춤이나 화려한 안무보다는 드라마 발레의 명성답게 섬세한 감정 연기가 주를 이룬 부분이다. 파티 장면에서 나이 든 인물들을 연기하는 무용수들의 어설픈 분장과 가발은 옥의 티다.타티아나타티아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비극이 극에 달한 2막의 결투 장면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모욕 당한 올가의 명예를 위해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 렌스키, 이들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결투 장면에서의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무대는 작품의 비장미를 끌어올린다. 푸쉬킨 역시 아내의 연인에게 결투를 신청, 서른 아홉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교계의 여왕이 된 타티아나와 그를 바라보는 오네긴(기둥 앞)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3막은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이야기다. 3막에서의 오네긴과 타티아나는 1, 2막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의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타티아나의 성장은 극적이다. 시골소녀에서 사교계의 여왕이 된 타티아나는 화려한 의상만큼 우아한 안무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타티아나에게 반하는 오네긴은 거만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허송세월을 보낸 남자의 무기력과 상실감, 쇠약한 모습이 오네긴의 표정과 행동에서 드러난다.

‘오네긴’의 중심이 되는 2인무(파드되)는 그 자체로 영화이자 연극이다. 1막의 거울의 파드되와 3막의 회한의 파드되는 이 작품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특히 3막의 2인무는 두 사람이 마치 태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움직인다.

3막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회한의 파드되(2인무)는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안무로 꼽힌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3막에서의 이 둘의 관계는 전세가 역전됐다. 1막은 타티아나가 순수한 사랑을 쏟아냈다면, 3막은 오네긴의 일방적인 구애다. 그 안에서 잊고 있던 옛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흔들리는 타티아나의 감정은 때론 격정적인 몸짓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닿을 듯 말듯 닿지 않고, 결국 단호하고 명료한 몸짓으로 러시아판 ‘막장’의 굴레를 끊어낸다. 격정적으로 치달리다 간결하고 강렬하게 끝내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순수한 타티아나, 나쁜 남자 오네긴이 존재한 것처럼 작품은 빠르게 달려갔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따라 이어지는 강렬한 동작들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남녀 주인공을 연기한 이현준 손유희의 호흡은 2인무에서 빛을 발한다. 실제 부부이기도 한 두 사람은 서로의 그림자가 되기도, 빛이 되기도 했다. 하나이면서 둘이었고, 둘이면서 하나였으며, 온전히 각자의 존재로 빛을 발하는 2인무를 보여준다.

‘오네긴’은 스토리텔링이 주가 된 작품인 만큼 기존의 발레가 보여준 무대와는 다르다. 화려한 볼거리를 주는 안무나 형식적인 동작, 대사를 대신하는 판토마임은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발레 용어는 ‘1’도 모른다는 초심자도 금세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예술감독(1961~1973)을 역임한 발레 거장 존 크랑코(1927~1973)가 발레로 선보였다. 196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세계 초연됐고,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2016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은퇴작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2009년 유니버설발레단이 초연한 이후 3만 2000여 명의 관객이 ‘오네긴’을 만났다.

국내에서 공연을 올릴 때마다 원작자의 공연권을 가진 존 크랑코 재단에서 한국을 찾았지만, 올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에선 해외 연출진이 내한하지 못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에 따르면 올해에는 연습 영상을 주고 받으며 작품을 준비했다. 특히 털사 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으로 원작의 연출을 맡은 제인 번의 ‘오네긴’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이현준 손유희 듀오는 비대면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무사히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공연은 오는 26일까지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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