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규모 30조달러 넘어서…국내는 1년새 4배 껑충
민간포럼서 ESG지수 발표 등 활동…거래소도 전담팀 신설
그래픽디자인: 박지영 |
전 세계 기업 환경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란 단어도 이제 식상하다. 국내 재계 일각에서는 CSR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가치(Social Value)’에 주목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당장의 비용을 아끼기 위해 폐기물 관리를 부실하게 하는 기업은 환경 오염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이러한 사실이 적발되면 벌금이나 영업 정지와 같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부정적인 여론에 직면할 수 있고, 기업의 장기적인 기업 가치까지 하향 조정해야 할 수도 있다.환경(Environment), 사회책임(Society), 지배구조(Governance)와 같은 비재무적 성과가 기업의 재무적 성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 시장 상황에서 기업의 ESG 리스크 관리 능력이 특히 투자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전 세계 투자업계, ‘책임투자’ ESG 시장에 주목
‘책임투자(Responsible Investment, RI)’로 대변되는 ESG는 이미 전 세계 투자 시장에서도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책임투자는 투자 자산을 선택하고 운용할 때 환경, 사회책임, 지배구조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투자하는 방식이다. 책임투자는 재무적 리스크 뿐 아니라 비재무적 리스크까지 관리해 지속가능한 투자 성과를 창출하고 장기 수익을 제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책임투자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 책임투자 규모는 2017년말 기준 약 30조6830억 달러(2017년말 기준, 약 3경2737조원)로 집계돼 2015년말 대비 2년 동안 34%의 성장률을 보였다.
특히 일본은 2014년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지속해 유럽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책임투자 자산을 운용하는 지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총 운용자산 대비 책임투자의 비중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눈에 띄는 것은 유럽의 책임투자 비중이 감소한 점이다. 이는 오히려 질적 도약으로 봐야 한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ESG업계 관계자는 “이는 유럽 전체에서 책임투자의 정의에 더 철저한 기준을 적용하려는 정책 기조의 영향으로 풀이된다”며 “향후 책임투자 기법의 고도화가 요구돼 책임투자의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이 이뤄질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유럽의회는 ‘지속가능투자 행동 계획(Sustainable Finance Action Plan)’을 도입해 자산운용사들의 책임투자 활동 보고에 통일된 공시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그린 워싱(green washing, 위장된 친환경주의)을 방지하도록 했다. 4000조원을 굴리는 세계 3대 자산운용사 중 하나인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SSGA)는 최근 사이러스 타라포레발라 최고경영자(CEO) 명의의 서신을 통해 ESG가 미진한 주요국 대기업들에 문제 개선을 요구했다.
타라포레발라 CEO는 서신에서 “ESG는 장기 전략을 위한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며 당장 올해 주주총회 시즌부터 ESG 개선안이 부실한 기업에는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SSGA가 지난해 도입한 ’R-Factor‘는 6000여개 기업과 산업을 대상으로 한 표준화된 ESG 평가기준이다. SSGA는 2022년까지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ESG 관련 주주관여 활동을 시행한다는 로드맵을 공개하며 R-Factor 점수가 지속적으로 낮은 기업들에 대해서는 의결권 행사를 확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SSGA는 이미 한국투자신탁운용과 함께 글로벌 ESG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하는 펀드를 내놓고 전주에 사무소를 여는 등 국내 노출도를 높이고 있어 국내 기업도 ESG 원칙을 적극 도입하는데 주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내 책임투자 시장 규모, 최근 약 4배 급성장
2013년 이후 6~7조원대에서 머무르던 국내 책임투자 규모는 2018년 27조원대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위탁 운용 유형 중 하나로 이뤄지던 책임투자를 지난해 국내 주식 직접 운용까지 확대하기로 한 데에 따른 결과다.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규모는 국내 주식 위탁 운용 4조5800억원에 국내 주식 직접 운용 22조600억 원이 추가되며 총 26조7392억 원 규모로 증가했다. 향후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위탁 운용을 30%까지 확대하기로 함에 따라 국내 책임투자 규모도 이와 함께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내 ESG 생태계 조성의 첨병으로 나선 ESG 평가기관은 서스틴베스트,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대신경제연구소 등 3곳이다.
이들 평가기관은 자체 모형을 활용해 국내 상장기업들의 ESG 관리 수준을 평가해 국내 투자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실제 투자의사 결정 시 기업의 재무적 요소뿐만 아니라 비재무적 요소까지 고려하도록 독려한다.
즉 주주를 포함한 각 이해관계자 관점에서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수준을 평가한다.
최근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ESG 등급위원회를 열고 19개사의 ESG 등급을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여의도 금융투자업계는 이미 ’ESG 열풍‘
한국 금융의 중심지인 여의도 일대는 ESG가 대세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12일 국내 기업 지배구조 개선 논의를 위해 국내 기관투자자를 주축으로 결성된 첫 민간 단체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출범했다. 강성부 KCGI 대표를 비롯해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 김봉기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등 금융투자업계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앞으로 지배구조 관련 상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운동을 비롯해 국내 기업들의 ESG 성과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이날 출범식에서 “지배구조 개선을 못하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어둡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를 여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는 지난달 29일 한국기업지배구조원, ESG모네타와 공동으로 ESG 채권지수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국내 상장주식으로 구성된 ESG지수는 여러 차례 발표됐지만, 회사채를 구성종목으로 하는 ESG 지수는 이번이 처음이다.
에프앤가이드의 ESG 채권지수는 신용등급이 AA-이상이고 ESG 평가등급이 B+이상인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 25종목을 선별해 산출된다. ESG 평가등급은 ESG를 영역별로 평가하고 등급화했다.
에프앤가이드 관계자는 “책임투자는 전략의 일부가 아닌 필수 경영방침으로 자리매김을 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채권 투자에 있어서도 ESG는 빼놓을 수 없는 지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SG를 둘러싼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금융투자업계 유관단체들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달 22일 ’2020년 주요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ESG 전담팀을 신설하고, 해당 분야 정보 공개 확대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는 올해 3대 사업 추진 방향 중 ’투자자 보호 강화를 통한 시장이용자 중심 시장 구현‘의 일환으로 ’ESG정보 공개 활성화‘를 제시했다.
라성채 유가증권시장본부 본부장보는 “기존 조사마케팅부를 21일자로 기업지원부로 바꾸고 해당 부서 내에 ESG팀을 신설했다”며 “향후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ESG 위원회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소는 이보다 앞서 지난해 12월 16일 코스닥 시장의 지배구조 우수기업들로 구성된 ’코스닥 150 거버넌스 지수를 선보였다. 현재 출시된 ESG 지수는 대부분 코스피 대형주 위주로 구성돼 있지만, 코스닥 기업들로만 구성된 ESG 관련 지수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