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현장에서] “청구인 15인은 사망하였고”…헌재의 뒤늦은 판단

“이 사건 심판청구 이후 위 청구인 공모 씨 등 15인은 각 사망했다. 따라서 위 청구인들에 대한 이 심판 절차는 위 청구인들의 사망으로 종료됐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12월27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발표 위헌확인’ 사건을 모두 각하하면서 내린 판단이다. 위안부 할머니 29명과 그 유족 12명은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며 위안부 문제를 합의하자 이듬해 3월 헌법소원을 냈다. 정부가 일본의 법적 책임을 묻고자 하는 할머니들을 배제한 채 합의해 이들의 재산권과 알 권리, 외교적 보호를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3년9개월의 기다림 끝에 헌재가 내린 결론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선언적 의미에 불과한 것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해 헌법재판소의 심판 대상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고 직후 위안부 피해자 측은 “고통받은 시간이 수년인데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라고 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가운데)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입장해 헌법소원 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

이날 오랜 기다림 끝에 허무한 결정을 받은 이들은 또 있었다. 일제강점기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들 2296명이다. 1940년대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고국에 돌아온 피해자와 가족들은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한 뒤 급여를 뺏기고 돌려받지 못했다. 이들은 2012년 11월 한국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분쟁 해결을 위한 조치를 다 할 의무가 있음에도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사할린 강제징용 사건은 헌재 최장기 미제 사건의 하나였다. 7년이나 지난 뒤에야 “정부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음으로 이를 전제로 한 위헌심판 청구는 부적법하다”고 했다. 역시 본안에 대한 판단도 없이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피해자 측 대리인에 따르면 그 7년 동안 정부 보조금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피해자 중 100여명이 숨졌다.

헌법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7년이나 시간이 걸렸는데 본안 판단도 없이 각하한 것은 청구인들의 헌법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은 아닌가. 헌재가 헌법적 관점에서 위헌인지 아닌지, 헌법소원의 대상인지 아닌지를 빨리 판단해서 줬어야 하지 않았겠나.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찾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헌재의 늦은 결정에 청구인들은 다른 기회들을 상실했다”고 표현했다.

물론 헌법재판소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일부러 사건 심리를 미루거나 늦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론에 따라 한·일 관계에 미치는 파장이 큰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재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고려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대신 헌법재판소 안팎에서 하는 말을 믿고 싶다. 지난 수년간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으로 바빴다.

또 국회 정치적 상황 때문에 헌법재판관이 장기간 공석인 상황도 있었다. 재판관들이 합의를 어느 정도 이뤘다가도, 세대교체가 되면서 선고일정이 늦춰진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다. ‘조지다’는 말은 일견 비속어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표준어다. 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망치거나 그르치다. 2. 허술하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하다. 3. 호되게 때리다. 그 뜻 하나하나가 곱지 않다. 비속어로 착각할 만큼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소설가 정을병(鄭乙炳)은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1974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단편소설 ‘육조지’를 발표했다. 법조계 주변에서 소시민들이 어떤 상황을 겪는지 담아냈다. 소설에 등장하는 육조지는 이렇다. 집구석은 팔아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진다. 판사는 미뤄 조진다.

헌법재판소가 누군가에게 형사책임을 묻고 유무죄를 판단하는 곳은 아니다. 일부러 정치적인 고려를 하면서 사건을 오래 끌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헌법재판소의 오랜 심리 과정을 외부에서는 살펴볼 수 없기 때문에 헌법재판관들께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심리를 해주셨으리라 미뤄 짐작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누군가는 ‘조져졌다’.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