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기우이길 바라지만, 최근 한국사회는 너무나 선명한 것들을 원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사회는 항상 뚜렷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많은 분들로부터 받은 질문이 청문회 정국 당시 조 장관 후보자 임명을 지지하는가 또는 철회하는가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내게 항상 뭔가 분명한 답을 원하는 눈치였지만 나의 답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듯하다.
그런데 한번쯤 우리는 사회를 진보와 보수로 가르고 전선을 형성하는 구태에 대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조 장관 임명을 지지해야 한다는 분들과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며 의견을 구한 분들 모두 지금은 전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싸움이 필요한 시기라 힘을 보태달라고 했다. 이 말이 불편했던 이유는 세상을 두 개의 시선으로 갈라치기하는 그 논리가 말 그대로 ‘투쟁의 구태’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세상을 두 개의 시선으로만 바라봐야 하는가. ‘나와 너’, ‘우리와 그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맴돈다. 논란에 서 있는 많은 ‘나와 너’는 정말 선명하게 구분이 되는 사람인가. ‘우리와 그들’은 무엇으로 인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일까.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말과 글을 쏟아내지만, 그렇게 ‘전선긋기’가 지금 시대에도 가능하고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만 늘어간다.
이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평화는 무엇인가’ 또는 ‘평화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질문은 평화의 원형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면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분명한 답이 아직 없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구실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갈등과 협력의 상태가 명확히 구분되어 나타나는가. 전쟁 상태와 같이 매 순간 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평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전쟁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이상향이라면 평화라는 말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론과 설명이 부연되는 이유는 일상의 삶은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순간에는 갈등과 협력의 양상이 항상 같이 존재한다. 친구, 연인, 가족, 동료 등과의 관계에서 갈등적 요소와 협력적 요소는 늘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요소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관리하는가에 따라서 조금 더 갈등의 양상으로 표출되거나 조금 더 협력의 양상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분명한’ 모범 답안이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 삶의 문제들을 갈등과 협력이라는 두 개의 시선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더 많은 해석과 더 다양한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선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편리함과 또한 상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비롯된다. 조 장관의 임명을 지지하는 것과 그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개인들의 생각을 진보와 보수로 구분할 수 있는가. 한 이슈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른 이슈에서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개인들의 사고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편리성 때문에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개의 이슈가 연결되면 그 편리성의 효용이 사라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매번 우리 사회는 개인들에게 선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의 현상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이다. 어쩌면 양 극단의 목소리 울림만 큰 세상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두 가지의 시선, 두 가지의 목소리로 시끄러운 세상이 아닌 더 많은 시선, 더 많은 목소리로 시끄러울 수 있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