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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공의 기개·논개의 충절…‘항일 魂’의 본향 통영·진주
이순신 영정모신 ‘충렬사’ 明황제 선물 명조팔사품 눈길
조선수군 통제영의 핵심 ‘세병관’ 그 웅장함에 압도
나전칠기 등 군수·진상품 제조 500년 역사 ‘12공방’
3800명 군사로 2만왜군 격파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논개 몸던진 ‘촉석루’ 영남 제일 누각이자 진주 상징
촉석루서 시연되는 무형문화재 ‘진주검무’도 볼만
미륵산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충무공 이순신의 전설같은 승전보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진=김성진 기자/withyj2@
국보 305호 세병관. 국내 최대 현판과 웅장한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진주 촉석루에서는 정기적으로 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 공연이 펼쳐진다.
전통 발 제조과정을 설명하는 조대용 장인. 전통을 잇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는 장인들이 많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통영 중앙시장 앞 바다에 전시된 거북선.

일본이 연일 뉴스를 뒤덮고 있다. 나쁜 의미로…. 수출규제 등 경제보복에 수상부터 장관, 극우기업인까지 연일 망언과 혐한발언을 쏟아내면서 한국을 자극하고 있다. 가깝고 가성비가 좋아 많은 사람이 떠났던 일본여행시장은 한국 국민들의 ‘보이콧’ 운동의 여파로 차갑게 얼어붙고 있다. 무례하고 무원칙한 일본 정치인들이 자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관광지를 찾아보는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정부와 관계기관, 지자체들 역시 국내관광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프로모션을 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외교적인 갈등유발로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라면 수백년 전 일본의 도발과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내거나 항거했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여행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코스 중 하나로 진주-통영을 꼽을 수 있다.

김시민 장군과 기생 논개의 충절이 아로새겨진 진주와 충무공 이순신의 승전보와 그를 기린 충렬사, 거북선 등을 볼 수 있는 통영은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맞서 조국을 지켜낸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즈음 이 곳을 찾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선택’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순신의 기개서린 통영=통영은 아름다운 남해바다와 미륵산에 둘러싸여 있고, 동피랑 서피랑 등 관광명소와 윤이상음악관 등으로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수백년 전 통영은 적국인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야했던 조선수군의 심장부였다.

통영은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진 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1593년 통영 한산도에서 초대 통제사를 임명받을 때부터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이 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선조 37년)부터 현재 세병관(국보 제305 호)이 있는 두룡포를 중심으로 통제영이 자리 잡으며,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될 때까지 209명의 통제사가 거쳐갔다.

통영 중앙시장 앞 내해에는 거북선과 판옥선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배를 복원한 것이 전시되고 있다. 이중 한척의 거북선은 한강에서 전시되던 것인데 서해를 거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내부에 들어가면 노를 젓는 곳, 포를 쏘는 곳, 수군들이 자는 곳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통제영 귀선(거북선)과 좌수영 귀선을 보면 거북모양 용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체에서 일자로 뻗어나온 것이 통제영, 잠망경 처럼 위로 올라간 머리가 좌수영 것이다. 통제영 귀선은 용두의 입부분으로 포를 쏠 수 있고, 좌수영 귀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해설사의 설명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부터 1597년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20여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조선의 수호신이었다.

통영시 명정동에 있는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이 곳은 훗날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등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1973년 사적 제 236호로 지정된 충렬사는 1606년에 왕명에 의해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충무공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관리했고 봄 가을 향사를 모신다.

약 2700평의 충렬사 경내에는 24동의 건물이 있는데 2층누각 강한루, 충렬사 재정을 관리하던 숭무당, 지방인의 자제를 훈육하던 경충재, 이항복 송시열 김수항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붓을 댄 충렬묘비 등이 있다. 특히 명나라 신종황제가 이순신의 대업에 감복해 내렸다는 8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보물440호)이 눈길을 끈다. 의장물중 도독인 1점과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 2점씩이 충렬사에 전시되어 있다. 일설에는 이를 선조가 질시했다는 말도 있다.

통제영과 함께 조선수군의 상징적인 유적으로 국보 305호인 세병관이 있다.

한산도에 있던 통제영이 육지인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통제영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이전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1646년에 증축했으며,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산 중턱에서 고을을 내려보는 위치에 자리한 세병관(洗兵館)은 화려하지 않지만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이 위압감을 준다. 국내 최대 크기라는 현판도 한몫한다. 세병관(洗兵館)은 두보의 시 ‘세병마’의 구절 중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구조 단층 팔작집으로 경복궁 경회루·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 기둥,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다. 이곳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도 배경으로 나와 이름을 알렸다.

▶통영 12공방=오래 전 부잣집에는 하나씩 있었던 것이 나전칠기 장이다. 검은 옻칠에 조개로 무늬를 넣은 나전칠기는 손도 많이 가는 고가의 예술품이었다. 나전칠기로 유명했던 곳이 바로 통영.

통영에는 나전칠기를 포함해 갓, 부채, 가구, 장신구 등을 만들던 공방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통제영 12공방’이 그것으로 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온 뒤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설치돼 그 역사 500년에 이른다. 공방에서 만든 물품은 조정에 진상되기도 했다.

공방에는 선자방(부채) 입자방(통영갓) 화원방(지도 등) 소목방(나무 가구 및 문방구) 야장방(철물 주조) 은방(금, 은제품으로 제작) 칠방(옻칠) 패부방(나전제품) 등이 있다.

거북선과 거북선 모형을 만드는 정복근 장인은 95년부터 문헌을 모두 뒤지다시피해서 거북선의 실제 모습과 크기를 복원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소목장인 김금철 장인은 3가지, 4가지 나무를 말리고 붙여 다양한 색상과 무늬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설명해 감탄을 자아냈다.

대발공예로 발을 만드는 조대용 장인은 “하루 3시간식 주 2회 60시간 정도하면 작은 창문에 걸 발 하나 정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이제는 발을 찾는 사람들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고급스런 발을 만들려면 장인의 손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려 고가품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김영란법 금융실명제 등으로 인해 수요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 공방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자영업도 병행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통영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미륵산은 해발 461m로 100대 명산 중에 하나이다. 미륵산을 용화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산에 고찰 용화사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다보면 풍광이 아름답다. 정상에 오르면 한려수도 일대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맑은 날에는 일본 대마도도 보인다. 갖가지 기암괴석과 바위굴, 고찰과 약수 등이 있으며 봄 진달래와 가을 단풍이 빼어나다.

▶김시민 논개의 충절이 어린 진주=진주하면 진주성과 김시민, 촉석루와 논개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관광 100선에 8년 연속 선정된 진주성은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592년 임진왜란 때 3800여 명의 적은 군사로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지의 하나로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성내에 있다.

김시민(155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목사직을 승계하였다.

먼저 공은 성안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또, 9월에는 진해로 출정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같은 해 왜군은 진주성(이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요충이어서 2만여 군사로 공격을 해왔다. 김시민은 3800여 명 군사로 힘을 다해 싸워 승리했으나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수일 후 순국하였다. 그 후 1604년에는 선무공신 2등에 추록(追錄)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한 진주 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는 현재 진주성내의 계사순의단 앞(충민사가 있었던 자리)에 단층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되어 있다.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성내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누각이다.

진주성 남쪽 석벽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웅장한 위풍은 진주성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성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南將臺), 향시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장원루(壯元樓)라고 한다.

고려 고종28년(1241)때 창건되었으며, 1950년 전쟁으로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중건하였다.

애초에 촉석루는 5채였으나 고려말과 임진왜란때 나머지가 다 불타고 한채가 남았다. 예로부터 북으로 평양 부벽루 남으로 진주 촉석루를 최고로 쳤다. 밀영 영남루와 남원 광한루도 이에 비견되지만 모두 120~180년 이후 지어졌다.

촉석루는 강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에 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시에는 지휘본부였고, 평시에는 학문을 겨루는 장소였다.

촉석루는 관기 논개가 왜군들의 연회 도중 적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뒤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해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때문에 논개의 충절을 기려 그의 위패를 모셔 지어진 것이 의기사이다. 조선에서 여성을 위해 제사를 지나고 지은 사당은 의기사가 유일하다. 5월 마지막 금토일요일에는 논개제가 열린다.

촉석루에서 정기적으로 시연되는 진주검무는 8명의 무희가 춘다고 하여 진주팔검무라고도 한다. 검무는 현존하는 궁중계열의 무용 중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며, 정부수립 후 무용 중에 처음 국가주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예로부터 여러 애국행사에는 진주검무를 추는 것이 상례였다.

수년간 조선 땅과 조선백성을 무참히 짓밟았던 일본의 왜군, 그러나 전력의 열세에도 사력을 다해 이들과 맞서 싸웠고 이겼던 충무공 이순신과 김시민 장군, 의기 논개의 충절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통영과 진주는 지금 특별한 기억을 선사할 것이다.

통영·진주=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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