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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스토리] “원자력 안전은 좌도, 우도 아니다”…엄재식 원안위원장의 이유있는 ‘소신’
취임 6개월 엄재식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불가피하게 국민 불안감 키울 때도 있어…허술하게 안전 챙기지는 않는다”
엄재식 원자력안전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원자력 안전은 ‘디폴트’ 말 그대로 기초값입니다”라고 했다. 원자력 활용을 두고 전문가와 국민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부딪치더라고 그 기저에는‘안전’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원안위가 충분한 신뢰를 드리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다만 저희가 허술하게 안전을 챙기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섭 기자/babtong@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방향에 대한 의견은 서로 충돌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격론이 안전이라는 ‘디폴트(Default)’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원자력 안전은 ‘디폴트’, 말 그대로 초기값 입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안전과 생활 방사선 안전규제 업무를 담당하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엄재식 위원장(53)이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디폴트’였다. 국민의 안전만큼은 모든 가치를 떠나 안전 그 자체로 우선 고려돼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1987년 고리 1호기를 상업 가동할 때만 해도 원자력은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과 산업 발전을 지탱할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원자력은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어느 누구도 100% 장담할 수는 없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념 논쟁의 장이 되기도 했다. 원안위의 결정에 갖가지 이미지가 덧씌워져 해석됐던 이유다.

엄 위원장은 “원자력 안전은 좌도 우도 아니다”라며 “원자력과 관련된 각종 주장의 근거가 어디에 있든지 원자력 안전만큼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했다. 그가 꾸려나가고자 하는 원안위의 ‘단순하면서도 굳건한 목표’다.

이달로 취임 6개월을 맞은 엄 위원장을 이달 초 서울 광화문 원안위원장실에서 만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모든 것을 바꿨다 = 10년 전쯤만 해도 원자력은 초중고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던 것처럼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안전하면서 친환경적인’ 에너지원이었다. 당연히 국민들의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11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미증유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국내는 물론 세계인의 인식과 시선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전 세계인들은 TV를 통해 원전 1호기에서 붉은 섬광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는 장면을 지켜봤다.

엄 위원장은 “그 장면은 세계적으로 원전의 안전에 경각심을 일깨우게 했다”라고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원자력 안전규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원전수출에 나서던 정부 방침과 맞물려 안전보다는 ‘진흥’에 더 신경쓰던 분위기였다.

그해 11월 원안위가 출범했다. 원자력 안전관리를 총괄하는 독립기구의 첫 시작이었다. 당시 원안위의 비전을 담은 ‘원안위 출범’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에 배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엄 위원장이다. 당시 그는 원안위 안전정책과 과장이었다.

“그간 전문 공학의 영역에서만 다뤄졌던 원자력이라는 분야가 사회적인 의미 안에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만 이뤄지던 규제의 범위가 사회적 안전이라는 큰 프레임으로 확대된 것이죠. 원자력 안전에 대한 정부 기능이 확대되고 기준이 강화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의 힘’입니다.”

위원회의 출범과 함께 엄 위원장은 창립멤버로 원안위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후 안전정책과장, 기획조정관, 방사선방재국장, 사무처장 등을 거쳐 위원장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그사이 위원회의 규모는 상당히 커졌다. 처음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원자력 안전을 담당하는 인원은 46명이었으나 출범 당시 원안위 직원수 82명으로 늘었고 현재는 155명이다. 8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만큼 원자력 안전이 정부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됐다는 의미다.

▶“신뢰 사회, 원자력 국민과 ‘같은’ 공감대 속에 있어야” = 행정고시 39회 출신인 엄 위원장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과학기술부에서 공직을 시작해 관련분야 명문으로 꼽히는 영국 서섹스대에서 과학기술정책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계속 원자력 관련 분야에 몸을 담고 있음에도, 대학시절 전공 때문에 그를 비전문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전공 덕분인지 몰라도 그는 국민의 시선에 민감하다. 이전 위원장들이 전문가들의 영역에서 원자력을 논의하는데 그쳤다면, 엄 위원장은 원자력 관련 논의가 일반 국민들의 선에서 더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원자력 안전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고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면도 있다. 이는 그동안 원안위가 충분한 신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면서 “다만 저희가 허술하게 안전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번 원전 현장을 직접 챙긴다. 매달 원전 지역에 가서 주민과 식사를 하며 의견을 청취하기도 한다.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던 ‘라돈침대 사태’ 당시 사무처장이었던 그는 현장에 살다시피 하면서 얼굴이 트고 새카맣게 탔다.

지난달 한빛 1호기 열출력 급증 사건 특별조사의 중간결과 발표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전남 영광군에서 진행된 것도 ‘국민과 눈높이가 같아야 한다’는 엄 위원장의 신념이었다. 이날 발표는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가감 없이 생중계 됐다.

원안위는 심사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심의과정의 속기록도 공개하고 있다. 엄 위원장은 원자력 안전에 관한 모든 정보의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정보공개 관련 법률안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남들에게 공감과 신뢰를 받으려면 자기를 다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중년’에 접어든 원자력 산업에 걸맞는 규제 = 지난달 원안위는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국내 28개 원전의 사고관리계획을 담은 사고관리계획서를 받았다. 원전 하나당 2만여 페이지 분량이다. 이를 모두 모으면 무려 3.5톤 트럭 한 대 분량과 맞먹는다. 이는 국내 처음으로 진행되는 관리 점검이다.

“원전산업의 태동기에는 설계기준 사고만 고려됐습니다. 원자로의 노심이 손상되는 중대사고는 발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그런데 원전은 200만 개 이상 부품이 들어간 거대 설비입니다. 인간이 작동하고 인간이 정비합니다. ‘100% 안전’은 어디에도 없고 이는 원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안위는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도 진행하고 있다. 스트레스 테스트란 설계 기준을 초과하는 지진이나 해일 등 극한의 자연재해를 원전이 얼마나 견뎌내는지 평가하는 시험이다.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에 대한 테스트가 완료됐고 이어 노형별 대표원전에 대한 시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엄 위원장의 설명이다.

엄 위원장은 원안위 내 원전해체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부서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2017년 국내 최초로 영구 정지된 고리 1호기의 해체계획서가 2022년까지 원안위에 접수될 예정이다. 그는 “해체 과정에서 안전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사용후핵연료 처리에 대한 규제는 어떻게 진행되야 하는지 앞으로 깊게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라돈침대 사태’를 계기로 진행된 원안위의 생활방사선 관리체계 전면 개편으로 당장 오는 16일부터는 팔찌, 침대처럼 몸에 장시간 밀착해서 쓰는 제품에는 방사성 원료물질의 사용이 금지된다. 또 ‘음이온’이라 불리는 방사선 작용을 이용하기 위한 제품을 만들어 팔 수도 없게 된다.

▶‘환영받지 못하는’ 일의 가치 = 충청북도 충주가 고향인 엄 위원장은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차관급 고위공직자지만 인터넷에는 엄 위원장에 관한 정보가 별로 없다. “고위 공직자 치고는 재산이 거의 없다”는 정도가 기자들 사이에 오가는 유일한 정보다.

그는 스스로를 “남들처럼 네트워크를 열심히 쌓거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술도 전혀 못하고, 비슷한 연배의 고위 관료들처럼 골프나 등산 같은 취미도 없다. 소위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직원들 몇사람에게 넌지시 "위원장이 어떠시냐"를 물었더니 하나같이 “존경하는 선배”, “책임을 져주시는 선배”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맡은 소임을 다 할 수 있게 묵묵히 기다려주는 리더라는 설명이다.

원안위원장은 사실 편치 않은 자리다. 안전 규제는 잘하면 본전이지만 잘못 되면 엄청난 비난을 뒤집어 쓴다. 게다가 그는 원자력을 운영하는 '산업부' 출신 관료도 아니다. 여러모로 껄끄러운 점이 많을 수 있는 자리다.

엄 위원장은 “환영을 받는 자리는 분명 아니다”라면서도 “모든 것을 떠나 제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라는 것이 이 업무안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공직자의 소명의식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래서인지 원안위 업무가 제게 참 잘 맞는다”라고 덧붙였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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