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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봉 안돼” vs. “친일파 백선엽” 국내 대표 보훈단체 공방 격화 왜?
-10일 황교안, 백선엽 만나 “김원봉 軍 뿌리아냐”
-16일 김원웅 광복회장 “항일정신 외면한 것”
-18일 재향군인회 “백선엽 장군과 군 전체 매도”
-20일 광복회, 향군 여의도서 규탄 및 맞불집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군사 편찬연구 자문위원장실에서 백선엽씨를 만나고 있다.[연합]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일제강점기 의열단장으로 활약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서훈 논란에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친일 이력 논란이 더해지면서 광복회와 재향군인회의 공방전이 격화되고 있다. 광복회 측에서 김원봉의 서훈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과거 친일 논란 이력을 들춰내자 예비역 군인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두 단체는 20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앞에서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에 대한 규탄집회와 맞불집회를 연다.

재향군인회 측에서는 군 원로와 재향군인회 회원 등 170~180여명이 참여하고, 광복회 측 200여명과 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합체인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원 50여명이 맞불집회를 연다.

광복회와 항단연 측은 ‘친일파 간도특설대 백선엽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온다네’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도 동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단체는 각각 ‘독립’과 ‘호국’의 맏형격인 보훈단체여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앞서 지난 10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6.25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만나 “북한군 창설에 기여하고 6.25 남침의 주범 가운데 한 명인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가 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며 “백 장군님이 우리 군을 지켰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명백한데 김원봉이라는 사람이 군의 뿌리가 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에 지난 16일 김원웅 광복회장은 황 대표와 백선엽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국가정체성을 부인하고 항일독립정신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백선엽이 과거 일제시대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점 등을 거론하며 황 대표를 향해 “몰역사적 행위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일제시대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독립군 말살의 주력부대였다”며 “중국 정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일제 간도특설대의 활동무대였던 연변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항일열사는 무려 3125명이나 되고 그중 85%가 조선인 독립군이었다”고 말했다.

백 장군은 광복 이후 국군 창설 때 합류해 6.25 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휴전회담 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대장으로 전역한 뒤 외교관과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하지만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등의 이유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됐다.

1965년 창립된 광복회는 국가보훈처 산하 공법단체로, 독립운동 선열들의 정신을 보존 및 계승하는 사업과 민족정기 선양사업 등을 목적으로 한다.

3선 국회의원 출신인 김 회장은 이달 7일 제21대 광복회장에 취임했다.

한편, 황교안 대표는 ‘백 장군이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는 부분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 과정 중에 아쉬운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큰 틀에서 이 분이 안보를 지켰다는 점을 존중해야 한다”며 “다른 부분을 폄훼하면 옳지 않다고 본다”고 답했다.

재향군인회는 지난 18일 광복회의 주장에 대해 “백선엽 장군과 군 전체를 매도하고 창군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며 “김원봉에게 서훈하려면 김일성도 서훈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단체는 20일 서울 용산 국방컨벤션에서 긴급안보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일제강점기 만주로 이주해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은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결성했다. 1930년대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면서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함께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았고, 광복 후 귀국해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을 역임했으나, 1946년 일제강점기 형사 출신 경찰에게 체포돼 고문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국가검열상 등 고위직을 지냈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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