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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 카페] “조선 신흥사대부는 애초에 없었다…고려 명문가 현대까지 명맥 그대로”
‘조선 건국의 신흥사대부는 애초에 없었다’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의 성격을 놓고 학계에선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왔다. 신진 세력이 여말선초 과도기의 균열을 틈타 구체제 지배층을 무너뜨리고 새왕조를 세웠다는 신흥사대부론은 학계의 통설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학 연구의 세계적인 석학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최근 저서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를 통해 신흥사대부의 출현은 애초에 없었다며, 고려의 세족이 조선의 사족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각 성씨의 변화를 보여주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과 성현이 작성한 ‘아국거족’의 명단을 분석, 놀랍게도 고려시대 주요 출계집단들(descent group: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본인들의 혈통을 추적하는 친척의 집합체로, 소위 가문을 뜻한다)가운데 소수만이 조선 초기에 쇠잔했으며, 규모가 크고 방계가 많은 출계집단들은 명맥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존 B 던컨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부 교수가 조선왕조의 뿌리를 고려왕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일치한다.

던컨 교수는 조선전기의 주요 양반 가문으로 38개 집안을 꼽았는데, 그 중 9개 집안만이 1351년 이후 관계에 진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도이힐러 교수는 출계집단의 출현을 5세기로 본다, 초기 출계집단 시스템, 즉 전통 한국사회의 기본 특징은 여러 신분집단으로 이뤄져 있었고, 소수의 엘리트 출계집단은 정치권력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귀족 가문이 출현하게 된다. 신라의 귀족들은 수도인 경주에 거주했는데, 신라가 붕괴되면서 지방으로 이주, 김(金)이나 이(李) 같은 중국식 성으로 신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동해안의 강릉으로 이주한 김씨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된다, 강릉 김씨와 같은 성과 본관의 결합은 엘리트층의 이름표 구실을 했다.

조선 초기 엘리트 집단은 인구의 10~12%로 본다. 이들과 나머지 사회구성원간엔 뚜렷한 경계선이 있었으며, 양인은 대부분 농민들이었고, 나머지는 거대한 노비집단이었다, 15세기 초에는 노비가 인구의 40% 가량을 차지했는데, 이들 없이는 엘리트가 존재할 수도, 엘리트 노릇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고 평가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이들 출계집단은 워낙 중요해 온갖 역사적 변화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가령 자식의 결혼이라든지 지역구 의원의 경우 여전히 가문의 배경을 따진다는 얘기다. 그는 최근 엘리트 층은 사회적 엘리트에서 경제적 엘리트로 바뀌고 있지만 상당히 부유한 경제적 엘리트도 오래된 사회적 엘리트와 관계를 맺고자 한다며, 규범의 힘은 상실했지만 감정적인 신비감은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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