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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고재, 사진작가 권순관 ‘더 멀치 앤 본스’展] 영문도 모른채 사라져간 이들...숲이 기억하는 폭력의 역사
권순관, 어둠의 계곡, 2016, 디지털 C 프린트 Digital C-print, 225×720cm. [제공=학고재갤러리]
“68년전, 희생자들의 눈에 비친 마지막 광경일 것”이라는 설명을 듣자, 어두컴컴한 숲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한 조명이 켜지고 꺼짐을 반복하는 사이 영문 모른채 죽어간 순진한 죽음들이 숲의 나무로, 풀잎으로, 흙으로 살아나 외치는 듯 하다. 끔찍한 비명일수도, 소리없는 흐느낌일 수도 있다. 소리없는 아우성이 가득한 이 작품은 사진작가 권순관의 ‘어둠의 계곡’이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는 권순관 작가의 개인전 ‘더 멀치 앤 본스’(The Mulch and Bones)를 개최한다. 식물의 뿌리 덮개와 뼈라는 뜻의 주제는 암매장된 사람들의 뼈와 살을 먹고 자란 식물, 그 밑에 숨겨진 역사를 의미한다.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전시장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묘사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흔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작가는 현대사의 아픔이 서린 곳을 찾아 촬영했다. 노근리와 제주 표선해변 등 말할 수 없었기에 더 비극이었던 장소들이다.

작가는 미군 야민 학살 현장으로 지목된 노근리 야산에서 텐트를 치고 일주일을 지냈고, 제주 4ㆍ3항쟁때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뒤 수장되다시피 버려졌다는 표선 해변에 보름 동안 2~3미터 파도를 수 백 차례 맞아가며 촬영했다. “그 곳에 선 채 제가 작가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어느 순간 희생자들의 시신이 잎으로, 돌로, 나무로 이곳에 남은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됐다” 평범한 숲의 풍경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만으로도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조용히 들춰낸다.

풍경 그 자체가 주는 장엄함도 장소가 가진 비극성을 더한다. 검은 바다와 파도의 하얀 포말이 대조를 이룬다. 카메라 필름에 소금물이 들어가 흉내내지 못할 흉터가 생겼다. 작가는 “파도를 보면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수많은 이들의 한이 서려 있을 것으로 생각해 섬 곳곳의 포말을 담았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역사를 현재로 소환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1973년 전북에서 태어난 작가는 사정상 부모와 떨어져 성장했다. 아버지가 장롱에 두고 간 캐논 카메라를 만지작대면서 사진에 빠져들었고, 종군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상명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사진전공자로는 최초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 전문사 과정을 밟았다. 권순관 작가는 디지털 카메라로 대부분 작업하는 요즘에도 필름 카메라를 고집한다. 이번 전시 작업도 모두 스위스 회사 지나(SINAR)의 대형 카메라로 촬영했다.

외부 환경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주목한 작가는 지난 2007년 5·18기념재단 선정 ‘올해의 사진가’에 뽑히며 전환점을 맞았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 유년시절을 함께한 외할아버지의 정신병 역시 한국 근현대사가 만든 희생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어두웠던 기억에서 한국 엿가를 재조명하며, 역사라는 가상이 어떻게 개인의 순수한 체험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전시는 11월 10일까지.

이한빛 기자/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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