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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정수립 100년 잊혀진 사람들② -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 “서른 넘어서야 할아버지 독립운동 알았다”

조부, 계몽운동·군자금 조달 활동
동양척식회사 폭파 사전 발각
고문 후유증 사망…할머니도 함구
보훈처 퇴역직원 조사로 알게돼


그의 한국나이 서른 여섯이던 1993년의 어느날, 고향인 전북 김제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조부 김종철 선생께서 국가 유공자이신 것 같은데요. 한 번 와 보셔야겠습니다.”

국가보훈처 직인이 찍힌 엽서를 받은 군청(당시 전북 김제군) 호적과 직원이었다. 김규홍(60) 씨는 당황스러웠다. 가족들에게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향을 찾아 받은 엽서를 확인한 그는 엽서를 보낸 경기도 광명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퇴역 국가보훈처 직원이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사료를 정리하던 중 확인한 내용을 김 씨에게 보내준 것이다. 김 씨는 “고령의 직원분께 큰절을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제에서 태어난 김 씨는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농사지을 땅이 없던 그의 부모는 김 씨가 어렸을 때 서울로 상경해 리어카를 끌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김 씨는 고향에 남겨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은 항상 놀림거리가 됐다. 친구들은 ‘부모 없는 자식’이라고 김 씨를 놀렸다. 김 씨는 13살 때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올라왔지만 3년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처음엔 공장, 성인이 된 후엔 운전을 업으로 삼아 입에 풀칠을 했다.

이런 가난은 조부 김종철(1905~1933년) 선생의 독립운동에서 시작됐다. 이른 나이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선생은 김제 지역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계몽운동을 하다 1927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에 가입했다. 그의 역할은 군자금 모집책이었다. 전라도 각지를 돌면서 부호들을 설득해 군자금을 모았다.

무장독립투쟁도 꿈꿨다. 직접 폭탄을 제조하고 권총을 소지하는 등 당시 익산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익산지점 폭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계획이 사전에 발각됐고 선생은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출소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김 씨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었다. 집에는 남은 전답도 없었고, 김 씨의 할머니가 밭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렸다. 지독한 가난 탓에 아버지 4남매 중 두 분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할머니는 남편의 독립운동 사실을 가족들에게 사실을 숨겼다. 김 씨는 이를 “할아버지가 옥살이도 하시고, 집에 순사들도 계속 들어오니 할머니께서 겁이 나셨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안됐다”면서 “나와 같은 경우가 전국 각지에 더욱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유공자 중 당시 신문기사나 형무소 수감일지 등 기록이 남은 숫자는 약 8만명이다. 하지만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은 7300여 명으로, 전체 보훈대상자의 9%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보상을 받는 경우는 6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도 “아직도 진상규명이 독립유공자 후손 본인의 노력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면서 “”정부 차원의 빠른 과거사 진상규명이 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자긍심의 문제“라면서 “(유공자 후손 중에는) 힘들게 사는 분들도 많을텐데 국가에서 이분들을 빨리 찾아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김성우 기자/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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