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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우리가 몰랐던 서울이야기
잠실·반포·일산 등 40년동안 옮겨다닌
고문헌학자의 다큐식 진짜 서울 기록

80년대초 놀이터였던 잠실은 아파트숲
서래마을은 알고보면 대홍수로 생겨나
풍납토성 등 역사적으로 복잡한 도시
시간의 층으로 바라보면 더 흥미로워


사람들은 어느 때인가, 문득 내가 나고 자랐던 동네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30분이면 닿을 서울 하늘 아래 동네인데도 집과 일터를 오가다보면 수십년이 지나서도 고향이라 부르기도 어색한 어린시절 동네를 가보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찮게 그 동네를 지나가게 되면 대개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만다. 거기서 기억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서울은 그렇다.

‘서울을 기록하는 고문헌학자’ 김시덕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의 ‘서울선언’(열린책들)을 들추면,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평생을 사대문 밖 서울과 근교에서 살아온 문헌학자가 서울을 걸으면서 느끼고 생각한 바가 적지 않습니다. 도시는 무심하게 보면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유심히 관찰하면 늘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슐랭 가이드처럼, 론리 플래닛처럼, 서울 답사기는 해마다 새로 나와야 합니다.” (‘서울 선언’에서)

그의 서울기록은 다큐멘터리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서울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 일상의 평범한 공간들, 산뜻하고 모던한 건물 뒤의 가리고 싶은 누추한 동네지만 당자자에게는 삶의 보금자리인 집과 길들, 동네의 마지막을 지켰던 것들, 수많은 발길이 오갔던 길에서 버려진 길로, 그 위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생활의 현장을 저자는 다급함과 애정어린 눈길로 기록하고 있다. 서울을 기록한 수많은 책들이 서울의 멋짐과 사대문안 역사적 공간들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김 교수는 이런 일상적인 공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을 ‘생활 속의 모험’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서울기록은 우선 그가 40년동안 옮겨다니며 살았던 동네들, 서교동, 신반포, 부천 소사, 잠실, 안양 평촌, 신구반포, 중계동, 일산 백석, 개포동, 낙성대 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1982년~84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비밀기지를 만들고 놀았던 잠실 주공 1단지는 현재 개발돼 잠실엘스아파트단지로 변해 있다. 잠실 주공 아파트 서남쪽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가 자리한 곳은 당시 갈대밭이 무성했고, 서쪽 탄천 너머, 소위 강남은 소년에겐 오락실이 있는 즐거운 것이 가득한 낯선 세상이었다. 강남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탄천이 세상 끝의 경계였고, 잠실은 서울이 아니었다. 당시 서민아파트인 잠실주공 아파트 단지에는 새마을 회관이란 이질적인 건물도 있었다. 전업주부 200명을 모아 봉제 작업으로 월 160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릴수 있도록 하자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유치원 시절을 보낸 부천 소사의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할미산 부근을 중심으로 신앙촌이 형성된 이곳은 개발이 진행중이지만 아직 종교적 이름이 곳곳에 남아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포함, 10년을 보낸 신반포와 구반포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 또래들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의 한가람문고와 문구, 오락실을 즐겨찾았다. 그는 그 때를 “황량하면서 달짝지근한 터미널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는 이 시절 충격적인 기억을 남긴다.

저자가 살던 곳들의 얘기가 40년 서울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면, 청계천으로 시작해 남산, 용산. 영등포, 흑석동, 목동, 시흥, 가리봉과 성남으로 이어지는 서울탐사는 본격적인 서울 근현대 100년의 이야기다.


서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19세기 말 청계천 남쪽에 일본인들의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북쪽에선 오늘날 ‘북촌’이 만들어진다, 1930년대 일본인이 청계천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건축왕’ 정세권이 개량 한옥을 대량 보급해 저지한 것이다. 북촌한옥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집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중산층 조선인들의 ‘마이홈’이라는 것이다.

복개 되기 전 청계천 지하와 지금의 청계천, 서울역 고가도로와 서울로 7017, 효창동의 식민지시대의 건물, 삼각지 교차로와 전쟁기념관 사이 좁은 공간에 존재하는 옛집들, 재개발이 확정된 보광동과 한남동, 용산역 경부선 한강 대로 이촌로 사이에 사각형으로 남아있는 식민지 시기 마을들은 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쓸쓸한 풍경을 보여준다. 프랑스인 마을로 유명한 서래마을과 논현역 부근의 주흥동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집을 잃은 이들이 정착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점, 흑석동의 전신인 명수대는 일본인 건축업자가 개발한 전원도시이자 경성의 베드타운이었다는 사실 등 마을의 흥미로운 역사도 지나칠 수 없다.

서울은 ‘사대문 안 한양에서 1936년, 1963년 새로운 지역들이 편입돼 넓어졌다. 여기에 풍납토성, 몽촌토성, 삼성동 토성 등 백제 초기수도의 유적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천년이 넘는 오래고 복잡한 도시다.

서울의 다양한 모습은 오랜 시간이 축적된 공간에서 뿐 아니라 빠르게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서울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가령 서울 서쪽 끝 강서구 개화·방화 지역에서는 여전히 농업이 이뤄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도시농업이 아닌 산업으로서의 대단위 농업이다. 농민들의 협동 조합이 있고 벼수매가 이뤄지는 서울 속농촌이다. 단위농협은 강남에도 있다. 바로 양재 시민의 숲에 본점을 둔 영동 농협이다. 이 영동농협의 관할인 자곡동 비닐하우스들은 수서역세권 공동주택지구로 지정돼 개발을 앞두고 있다. 서울 속농촌이 또 한 곳 사라지는 것이다.

저자는 사라지는 것들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지만 그렇다고 뭐든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변화 자체가 공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관심 속에 소중한 역사가 파괴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백제 삼성토성이 한 예다.

답사 현장에 앉아 메모하고 그리고 쓴 글과 사진들은 지난 10년 안팎 서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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