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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PAS]난 아니라고? 갑질은 재벌만 하는 게 아니에요

[헤럴드경제 TAPAS=나은정 기자] “우리가 이겼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 아파트에서 불거진 ‘택배 갑질’ 논란이 실버택배 도입으로 일단락된 지난 17일, 다산신도시의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입니다.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위해 신도시 아파트가 단지 내 택배 차량의 지상출입을 막으면서 생긴 논란은 정부의 조정으로 합의점을 찾았습니다. 수많은 누리꾼이 아파트 측의 ‘갑질’을 지적하며 분노했지만 해당 글을 작성한 누리꾼은 ‘택배대란 다산이 이겼습니다’라는 글에서 “역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더니…”라고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갑질은 지금도, 당신 곁에서.

흔히 갑질은 권력과 금(金)력이 있는 자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지지만, 보통 사람들의 생활 속 갑질은 우리 주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백화점 매장에서, 편의점 계산대에서, 은행 창구에서, 식당에서, 콜센터 전화에서… 당신 곁의 보통 사람이 당신과 같은 보통 사람에게 말이죠.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3년전 대전의 한 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40대 여성이 직원의 뺨을 때리는 등 폭행한 동영상이 누리꾼의 공분을 샀었죠. 이 여성은 옷을 교환하러 왔다가 “옷에 립스틱이 묻어 교환이 어렵다”고 한 직원의 말에 화가 나 이같은 행패를 부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천의 한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주차 직원의 안내를 무시하고 무릎 꿇게한 ‘백화점 모녀’ 사건도 대표적인 생활 갑질 사건이었죠. 3개월 동안 114 전화번호 안내서비스에 1600차례 전화를 걸어 여성 상담원에게 욕설과 음담패설을 일삼다 체포된 남성은 또 어떤가요.

[사진=2017 경기도 비정규직노동자 정책토론회 자료집]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이 지난해 실시한 ‘택배노동자 현장, 인권, 노동실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378명 가운데 58%(218명)가 택배노동자 본인의 잘못과 무관하게 욕설을 듣고, 22%(83명)는 컴퓨터, 세탁기, 선풍기 등의 설치를 요구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방문 요양을 하는 50~60대 여성 요양보호사들은 파출부처럼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강요받고, 숱한 성희롱 폭력에 시달립니다.
이처럼 ‘갑질’은 우리 일상에 뿌리 깊게 만연해 있습니다.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세~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갑질 문화’ 관련 설문조사에서 성인 2명 중 1명(54.3%)은 일상생활에서 갑질 횡포를 당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또 응답자의 약 47%는 ‘서비스 이용자/손님의 갑질이 심각하다’고 했고, 가장 많이 경험해 본 갑질의 사례는 ‘무시와 하대 등의 무례한 행동’(54.7%)이었습니다.

   너님의 갑질, 이제는 안 참아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나듯, 보통 사람들의 생활 속 갑질은 흔히 서비스 이용자와 서비스 직군 종사자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고객 응대 과정에서 자신의 실제 감정과는 다른 친절한 감정을 표현하도록 요구받는 이른바 ‘감정노동자’들은 악성 고객의 ‘갑질’에 가장 취약하죠. 하지만 그저 당하고 참기만 했던 감정노동자들에게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용자와 고용주의 보호 덕분이죠.


이마트는 작년 3월 고객 응대과정에서 불필요한 감정적 손실을 줄여 임직원을 적극 보호한다는 ‘E-Care(이케어) 2.0’을 선포해 시행 중입니다. 부당한 고객의 악성 요구나 접근에 대해 거부할 수 있도록 기존 프로그램의 규정을 재정비하고, 고객 응대담당 직원들에 대한 내부상담 강화 등 감성관리에 나선 겁니다. 이마트는 고객의 폭언이나 성희롱이 지속될 시 상담 거부 ARS를 송출해 단선 조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고객 센터 및 계산대 등 고객과 직원이 대면하는 장소에는 ‘대(對)고객선언문’을 비치하는 등 언어폭력이 처벌 받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경각심을 담은 메시지도 전하고 있죠.

홈플러스는 지난 1월 ‘마음플러스’ 프로그램을 도입해 직원들의 심리안정 상담과 악성 고객 응대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하는 절차를 강화했습니다. 폭력ㆍ폭언 및 각종 위협과 악성 클레임에 대한 대처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직원 마음 챙김이’를 지정하는 등 직원들의 심리적 고통 경감을 위해 팔을 걷었습니다.

LG유플러스는 성희롱이나 음란전화가 들어오는 경우 첫 번째 통화에서 전화를 끊을 수 있고, 작년 9월부터는 고객센터 상담전화 연결음에 실제 상담사의 가족이 직접 녹음한 음성을 넣은 ‘마음연결음’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상담해 드릴 예정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우리 딸이 상담해 드릴 예정입니다” 등의 음성 안내를 통해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의 마음을 진정시켜 원활한 상담을 기대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실제 ‘마음연결음’ 시행 이후 258명의 상담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4%가 호의적인 고객이 늘었다고 답했고, 고객으로부터 격려의 말을 듣고 존중받는 느낌ㆍ상담을 더 잘해주고 싶다고 느꼈다는 답변이 82%에 달했습니다.
 
   ‘갑질’은 죄…당신은 떳떳한가요

고객의 갑질로 부터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움직임은 기업 측의 제도 도입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난달 30일 국회를 통과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감정노동자에게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을 대통령령에 따라 조치토록 의무화했습니다. 감정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직접 보호 조치를 요구할 수 있고, 노동자의 요구를 이유로 사업자가 그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불리한 처우를 할 수 없는 보호 규정도 더해졌습니다.

법안을 발의한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고객응대 노동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지 인격을 파는 존재가 아니다. 일부 고객들의 부당한 갑질에 지친 노동자에게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고, 왜곡된 고객응대 문화가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갑질’은 죄입니다. 폭언과 폭력을 일삼으며 규정에 없는 환불 보상 등 금전적 대가를 요구할 경우 폭행ㆍ협박죄 또는 공갈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보상을 받거나 괴롭히려는 의도로 공개사과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하면 협박죄 또는 강요죄에 해당되고, 전화를 반복하거나 장시간 통화를 시도하면 업무방해죄ㆍ정보통신망법 위반입니다. 고의로 이물질을 넣거나 제품을 일부러 파손한 뒤 언론에 유포하면 사기죄 및 업무방해죄, 명예훼손죄로 처벌 가능합니다.

[사진=인스타그램]

“반말로 주문하시면 반말로 주문 받음”, “우리 모두 남의 집 귀한 자식입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큰 호응을 얻은 소상공인 업체들의 안내문과 유니폼 문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경기비정규직센터 심지형 노무사는 일상의 갑질 문화에 대해 “비정규직의 경우 소비자의 갑질에 더욱 취약하다. 해고되면 밥벌이가 끊기기 때문에 무조건 참고 시키는대로 하게 된다”며 “우리가 모두 감정노동자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회사원도, 의료인도, 판매원도 모두 같은 감정 노동을 하고 있다. 지불에 대한 권리만큼 사람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친절을 바라는 건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 전에 똑같은 인권을 가진 ‘귀한 자식’임을 인식하고 인격적 대우를 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대기업 오너가(家)의 거대 갑질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은 일상의 갑질에 떳떳한 당신께만 있습니다.


/better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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