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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광장-강태은 프렌닥터연세내과 비만클리닉 부원장]천번을 속아야 부모가 된다
아버지의 도시락 사연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엄마가 집을 나가고 홀로 고등학생이 된 딸을 키우던 아버지의 이야기다. 바쁜 직장생활로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집에 귀가한 아버지는 새벽에 등교하는 딸을 위해 늦은 밤 도시락을 준비했다. 말라 버린 계란말이와 흉하게 탄 고기완자, 너무 찰지거나 너무 딱딱한 밥. 볼품없는 자신의 도시락이 다른 아이들의 엄마 도시락과 비교되는 것이 싫어 딸은 친구들을 피해 도시락을 먹어 왔다.

고3이 끝나는 날, 딸은 아버지의 도시락을 열고 엉엉 울었다. 마지막으로 싸 주는 딸의 도시락을 위해 아버지는 밤을 새워 10가지 반찬을 정갈하게 담았다. 딸이 기억조차 없는 3년전 첫 도시락 사진과 함께 따스한 손편지를 넣어줬다. “3년간 아빠의 부족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어 줘서 고맙다. 그래도 아빠 도시락 실력이 정말 많이 늘지 않았니? 잘 커줘서 고맙고 사랑한다.”

필자는 이 일화를 듣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약 30년 전 부모가 될 거라는 상상조차 못하던 철없던 딸로 살던 필자의 모습이 떠올랐고, 20년간 좌충우돌 아들을 키우며 도시락을 싸 본 부모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고2였을 때다. 학교 식당건물을 신축하면서 몇개월간 도시락을 싸 갔던 아들은 “급식보다 도시락 섭취가 속 편하다”며 계속 도시락을 원했다.

필자는 아들의 제안대로 1년간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도시락’을 실천하게 됐다. 가끔 아들이 “반찬이 어제와 똑같다”, “연어를 반찬으로 싸주면 신선하지 않은데”, “엄마, 나 콩 싫어하는 거 알면서” 등 의견을 말하면 새벽부터 정성껏 준비하는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비운의 여주인공인 양 서운한 감정을 대꾸없는 표정으로 전했다.

그러다 문득 30년 전 필자의 어머니께서 싸 주셨던 정성 가득한 도시락이 떠오르면, 스스로 싼 도시락이 초라해 ‘아들에게 웃어 줄걸’하고 반성하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필자의 부모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아침마다 전화기만한 반찬통에 8개의 찬을 골고루 싸 주셨다. 따스한 보온 국은 물론 직접 빚은 햄버그스테이크, 샐러드, 나물을 고르게 넣어 주시고 도시락 김치 냄새에 까칠한 필자를 맞춰 주느라 정말 고생했다.

필자는 그 감사함도 모른채, 2교시 후 자신의 도시락을 미리 해치운 친구들이 점심시간 포크를 들고 달려들면 “내 반찬을 먹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 필자는 도시락을 쌀 일이 없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막상 지나고 보니, 그때 그 시절 전투하듯 정신없던 새벽의 분주함마저, 아들의 솔직한 의견에 토라지게 반응했던 내공 없던 스스로의 철없음마저 추억 속 아련한 한 장면이 돼 버렸다.

시간이 흘러 아무 것도 해줄 필요가 없어지는 때,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는 그 때가 되면 그 시절 그 추억은 인생에서 돌아가고픈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오십대 중반의 지인이 생일날 아들이 준 선물로 투정을 했다. 생일에 뭘 갖고 싶은지 아들이 여러 번 묻더란다. 아들의 컴퓨터를 열어 보니 검색창에 목걸이와 팔찌를 검색했건만, 달랑 책갈피 하나를 사 왔다는 거다. 아들의 책상 서랍에 감춰진 박스 포장을 봤는데 그 선물은 내 차지가 아니고, 기념품 숍에서 흔히 볼만한 얇디얇은 금색의 책갈피였다는 거다.

흥겹게 축하 노래를 불러주며 세차게 박수쳐 주는 아들이 민망할까봐 감격한 척 했지만, 사실 마음 속에서는 실망이 컸단다. 참다 그 속내를 남편에게 말하니 “철없다”는 꾸지람까지 들었다는 거다.

필자는 그 또한 돈 주고 살 수 없는 행복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목에 리본을 달고 “엄만 나만 있으면 되지”라며 선물을 생략하던 아들은 이제 필자의 손을 꼭 잡으며 “축하해. 엄마. 많이”라며 눈에 더 힘을 준다.

필자는 말한다. “속으면서 살자”고. “우리도 그러하지 않았냐”고. 매일 속으며 사는 필자는 혼자 야무진 상상을 해 본다. 언젠가 아들이 오십 다 된 엄마에게 “나들이 가자”고 청하는 행운을 맞이한다면 “밥이 질다”, “반찬이 무(無) 맛이다”라고 아무리 핀잔을 받아도 ‘사랑 반찬’을 두 배로 담아 행복한 소풍을 떠나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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