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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12월에 전화벨이 울릴 때
1984년, 우리나라에 유리겔라라는 초능력자가 왔다. 마술이 오락으로 대중화되기 이전에, 유리겔라의 숟가락 구부리기는 외계인 초능력처럼 신기한 것이었다. TV를 통해 소개된 그의 염력에 이끌려, 사람들은 숟가락을 집어 들고 저마다 문지러거나 째려보곤 했다. 20년이 더 지나서도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인상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왜 하필 숟가락이지?”

소설가 하성란 씨가 단편소설 ‘1984년’에서 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보다 더 가난한 시대의 취업은 참으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법원에서 타자수를 모집한다는 광고에 서울 시내 모든 실업계에서 학생들이 몰려들고 강당에서 수백 명이 동시에 타자를 쳐대는 경쟁의 아우성이 벌어진다.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도 다른 사람에게 일거리가 가기 전에 먼저 가서 뺏어 와야 하고, 옷가게 여자들도 손님을 뺏기지 않으려고 머리채를 쥐고 상가 바닥을 나뒹군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면접이라는 것을 해보고 졸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T라는 강력한 경쟁 상대 앞에서 뻔한 결과를 직감한다. 그런데, 그녀의 내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우까락을 구부려어, 너어는 하알 수 있어 ……’ 그녀는 결국 최종 입사자가 된다. 취업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을 발휘할 만큼의 특별난 사람에게 일어났던 셈이다.

최근에, 한 제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 학생들이 전화할 때는 학업, 성적, 결석 등 작은 애로 사항이 있을 때나, 취업이나 진로를 위해 추천서를 받기 위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12월의 전화는 조금 다르다. 대학 4학년 학생들의 진로가 결정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진학 혹은 기업 입사 소식 등, 캠퍼스를 떠나 세상의 문턱에서 선 채 자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소식이 대부분이다. 특히, 12월 말에 제자의 전화벨이 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기쁜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교수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어요.” 자신도 믿기지 않는지 깊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곤 한다. 전화를 건 쪽이나 받은 쪽이나 놀라서 숟가락을 구부린 것처럼 조용한 비명을 지르며 기뻐한다.

유리겔라의 초능력이 사기였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숟가락을 음표 모양으로 구부렸다고 해서, 유리겔라의 염력처럼 ‘너어언 하알 쑤 있어’라는 말만으로 미래의 문이 열리지는 않는다. 12월에 오는 전화가 반가운 이유는 오랜 시간 고된 노력과 열정으로 일궈낸 아름다운 결실들이기 때문이다. 취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았을까. 작가로 등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퇴고를 거치고 파지를 냈을까. 마치 그리스신화 속의 시지프스처럼 매일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면서 무의미한 시도라고 실의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그런 반복된 노력 속에서 취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아름다운 생각들을 자신의 어휘들로 설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탈무드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12월 전화가 특히 기쁜 이유를 이 구절이 설명해주지 않나 싶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비슷해서, 짓눌리고 쥐어 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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