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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1300년 명문의 무게를 느껴라
자신의 처지 써내려간 고려 이규보의 산문
조선 대학자 이황·조식의 주고 받은 편지
각 시대 문장가 229명 산문 613편 담아내
바쁜 현대인에게 사유·명상의 시간 제공

“나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겠소?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와 관계가 있을 뿐이오. 한 번 입을 열고 한 번 입을 다무는 데서 영예와 치욕이 나온다오.(…) 성인은 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입을 두려워한다오. 입을 조심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소?”

고려 500년 최고의 문인으로 꼽히는 이규보가 독관 처사와 충묵 선생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두려움에 대해’ 쓴 글이다. 독관 처사는 세상 온갖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데, 충묵 선생은 두려울 게 없다며, 오직 자신의 입만이 두렵다고 말한다. 고려 무신 정권의 한 가운데서 관직에 오른 이규보(1168~1241)의 처지가 느껴지는 글이다.

우리 고전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해온 안대회, 이종묵, 정민 교수 등 우리시대 한문학자 6인이 각 시대의 문장가 229명이 쓴 산문 613편을 골라 ‘한국 산문선’(전 9권 민음사)을 펴냈다. 2010년부터 8년간의 작업의 결과로, 신라의 고승 원효(617∼686년)부터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1893∼1950년)까지 130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시대순으로 정리한 통사 산문선집이다.

봄 경치를 바라보며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과 심경을 담아낸 글이나 우렛소리를 듣고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지 사소하 것까지 짚어보는 등 이규보의 산문은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하는 게 많다. 이규보의 이런 명문 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서 내로라하는 명문장가들의 글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선집이 나왔다.

우리 고전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해온 안대회, 이종묵, 정민 교수 등 우리시대 한문학자 6인이 각 시대의 문장가 229명이 쓴 산문 613편을 골라 ‘한국 산문선’(전 9권 민음사)을 펴냈다. 2010년부터 8년간의 작업의 결과로, 신라의 고승 원효(617∼686년)부터 민족주의 역사학자 정인보(1893∼1950년)까지 130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시대순으로 정리한 통사 산문선집이다.

선집은 원효가 ‘공(空)’의 이치를 설파한 불경 ‘금강상매경’에 주를 단 ‘금강삼매경론’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원효는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인 한문 문장을 남긴 첫번째 작가로 꼽히지만 우리 문학사의 본격적인 문인은 최치원부터다. 당(唐) 광명 2년,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지은 ‘토황소격문’은 유명하다.

신라 왕족 출신으로 흥덕왕과 헌덕왕 때 집사부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며 정권을 장악했던 김충공의 부하 관원인 녹진의 글은 허수로이 넘겨볼 게 아니다.

녹진은 인사를 주무르는 김충공이 골머리를 앓다 감기에 걸려 앓아눕자 사사로이 사람을 쓸 게 아니라 원칙을 지키면 어려울게 없다며 진언한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큰 목재로는 들보와 기둥을 만들고 작은 목재로는 서까래를 만들며, 눕힐 것은 눕히고 세울 것은 세워 각기 제자리에 놓은 뒤에야 큰 집을 완성하는 법입니다. 옛날 어진 재상이 정치를 하는 것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고려의 문장은 ‘삼국사기’의 김부식, 임춘, 이인로, 이규보, 유승단 등으로 이어지며 만개한다.

막힘없이 글을 지어 배 속에 원고가 들어있다는 뜻의 ’복고(腹藁)’라는 별명을 얻은 이인로((1152~1220)의 글 ‘도연명처럼 눕는 집(臥陶軒記)’은 ‘도연명 바라기’ 이인로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인로는 도연명을 삶의 모델로 삼겠다며, 자신의 집 이름을 와도헌(臥陶軒)이라 짓는다. 어떤 이가 이인로에게 의아해하며, “자네는 도잠과 비교해 보면 같은 것은 얼마 되지 않고 못 미치는 것은 많은데 자신을 그에게 견주는 일이 옪다고 하겠는가?”고 묻는다.

이에 이인로의 응수가 여유만만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쫒아갈 수 있다네. 시냇물도 만 번을 굽이쳐 동쪽으로 흐르면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법일세. 내가 비록 도잠의 높은 뜻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지만, 계속 사모한다면 또한 도잠이 될 수 있을 것이라네.”

이종묵, 장유승, 정민, 이홍식, 안대회, 이현일 편역/민음사

오늘날 자주 회자되는 ‘인문’이라는 말은 정도전의 ‘문장은 도를 싣는 그릇’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은 인문(人文)을 규정하는 말로 시작한다. “해와 달과 별은 천문(天文)이요, 산천과 초목은 지문(地文)이요, 시(詩)와 서(書)와 예(禮)와 악(樂)은 인문(人文)이다.”

정도전의 글은 중국의 영향 아래에서 조선의 독자적인 문학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였다. 조선은 가장 많은 문장을 남겼다. 이번 산문선은 널리 알려진 문장가 뿐 아니라 특유한 색채를 보이는 작가와 논설, 상소문, 일기, 묘지명 까지 문장의 모든 갈래를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여기에는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오줌통’이야기 까지 마다 않고 기록한 강희맹의 우화, 조선의 대학자 이황과 조식이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관해 넌지시 조언을 주고받은 편지, 이이가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거침없이 논평한 글에서부터 마음이 아름다운 노비, 문장에 정통했던 장모님, 개성있고 자존심 높았던 화가 등 비주류 인물의 전기, 담배 고구마 코끼리 같은 새로운 문물에 관한 보고서까지 다채롭다.

옮긴이들은 글을 가려 뽑은 기준으로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드러나 지성사에서 논의되고 현대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글을 제시했다. 삼국시대부터 20세기까지 1300년의 시간여행을 하면서 한 편 한 편 읽는 맛이 남다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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