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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님에 원두커피 직접 내려주는 ‘문화 정치인’
중학시절 서울 유학하며 사회의식 눈뜨고 운동권 유인물 만들다 정치 입문
바른정당 창당 주역 정병국 의원


‘보수통합’, ‘중도통합’, ‘보수중도통합’…. 야권발(發) 통합론이 무성하다.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정책ㆍ선거연대에서부터 당대당 통합까지 논의의 형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형태와 내용에 있어 각기 다른 통합론 중에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각각의 통합론의 당사자로 바른정당이 항상 언급된다는 점이다. 최근 2차 탈당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유승민 대표 체제를 출범시킨 바른정당은 모든 통합론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야권 정계개편의 한축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바른정당의 진로가 어디로 향할지 주목된다.

헤럴드경제는 지난 13일 의원회관에서 바른정당 창당을 주도한 정병국 전 대표를 만났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안들이 산적해 있지만, 정 의원은 ‘순리’를 언급하며 오히려 여유로움을 보였다. 현안에서 한발짝 물러나 그의 인생 역정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그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 가늠해보기로 했다. 

정병국 바른정당 의원은 어린시절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느낀 문화적 충격과 상대적 박탈감에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나서면서 ‘정치인 정병국’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그는 앞으로도 문화에 방점을 둔 정치를 할 것이라고 했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시골 촌놈’의 문화적 충격, 문화부 장관으로 이끌다=이날 인터뷰를 위해 정 의원의 방을 찾았을 때 그는 바로 찻잔을 준비하더니 커피 원두를 갈았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끓여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손수 내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봤을 때 커피 접대는 그의 일상인 듯 보였다. 의원실은 이내 커피향으로 가득 찼다. 자연스레 인터뷰는 커피 화제로 시작됐다.

그는 “내일(14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원조모델을 논의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출국한다”며 “에티오피아가 커피 원산지인 것은 아실텐데 굉장히 좋은 커피지만 제값을 못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제대로 가공만해도 ㎏당 100달러까지 받는데, 에티오피아에서는 기술이 떨어져 원두를 생두로 팔다보니 2~3달러에 판매하고 있다”며 “이를 관광상품화해서 현지에서 시음도 하고 판매도 하는 그런 상품을 코이카(KOICA), 수출입은행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원실 여기저기에는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인물 사진 중에는 아프리카에서 작업한 김중만 작가의 것도 있었다. 아프리카와의 인연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시절 탄자니아에 정부가 지원해 ‘세렌게티 인포메이션 센터’를 준공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냐 친선협회 회장을 했고, 2013년에는 제4대 대통령 우후루 케냐타의 취임식에 참석해 당선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시골 촌놈’의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된 듯 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유학온 그는 그때를 회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그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전학년이 명동으로 문화활동을 갔다. 지금의 예술극장, 당시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했다. 김동리 선생의 무녀도였는데 주연배우가 전양자씨였다. TV에서 보던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했다.

처음이 힘들었지 그렇게 문화생활에 눈을 뜨게 된 그는 용돈을 아껴서 연극을 보러 다니고 극장을 찾았다. 정 의원은 “그렇게 시작된 문화생활이 삶의 일부가 됐고, 정치를 하면서도 이 부분을 담당하게 됐고 장관까지 됐다”며 “어찌 보면 그때의 문화 체험이 내 삶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 그래서 문화 체험에 중점을 둔 정책을 많이 고민했다”고 평가했다.

유년시절 ‘서울 유학’으로 눈 뜨기 시작한 사회의식=경기도 양평 출신인 정 의원은 농사꾼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머슴살이를 하시던 무학(無學)의 아버지를 보면서 딱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뭐가 되겠다는 것보다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꿈이 많아서 어느 하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때 무시험 추천제로 입시제도가 바뀐다는 뉴스를 접하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서 어느날 새벽 아버지는 자던 그를 깨웠다. 수킬로미터 떨어진 역까지 걸어가면서 아침이슬에 옷이 흠뻑 젖은 채 그렇게 서울행에 몸을 실었다.

서울 돈암동 산동네에 방을 얻은 그는 먼 친척의 보살핌을 받으며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산동네에 살다보니 밤 12시가 돼야 수돗물이 나왔다. 수압이 약하다보니 다들 자는 시간이라야 물을 쓸 수 있었다.

구공탄에 밥을 해먹고 학교를 가면 80명이 한 교실에 가득 들어찼다. 반 친구들 중에는 자연스레 가족들과 영화를 보고 왔다는 둥, 음악회를 갔다왔다는 둥 문화생활을 자랑스럽게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그들과 어울려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다. 대학에 들어와서 이런 불평등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끼게 됐다. 그러나 정식으로 학습(?)을 한다든지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이나 PD(People’s Democray, 민중민주주의) 같은노선을 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찾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잠시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갔으나 거기서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를 만나면서 자신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1979년 부마사태로 수배를 받아 도망을 다녔고, 이듬해 5ㆍ18 소식을 통문으로 전해듣고 광주로 내려갔으나 진입에 실패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다 용산역에서 검거됐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끈질긴 설득에 해병대 입대를 결정했다.

복학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다. 각 캠퍼스에서 제작하는 유인물을 제작하는 총괄담당자가 그의 역할이었다. 졸업 후 보험회사에 잠시 다녔지만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출판사 형태를 빌어 운동권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퇴직금을 밑천으로 고려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이대 등 5개 대학의 포스터, 팜플릿, 걸개그림을 제작했다. 그는 “축제 홍보물을 제작하는데 비용이 1000만원이라고 하면 계약서는 그렇게 써주고 500만원에 제작해 나머지는 학생회 활동자금으로 전달했다”며 “우리가 남기는 이익은 최소한으로 하고 운동을 지원하는데 쓸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운동권과 묶이면서 20대의 그의 삶은 수배의 연속이었다. 1987년 경찰에 붙들려 장한평에 있던 서울지방경찰청 분실에 있다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밝혀지면서 풀려났다. 그리고 6월23일 다시 잡혀간다. 그는 “이번에는 안기부에 잡혔는데, 그때 내가 제작한 게 ‘분단을 뛰어넘어’라는 책이다. 미국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쓴 방문기였는데, 베스트셀러였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금서로 분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입수해 돌려서 읽고 있었는데, 그걸 2000권 가량 리프린팅한 건데 인쇄소에서 신고해 버린 것”이라고 했다.

6ㆍ10 항쟁으로 민심이 끓고 있던 터라 남산에서 취조를 받는데도 최루탄 가스로 매케함이 끊이지 않았다. 며칠 취조가 계속 되던 중에 담당수사관이 뒷통수를 치며 “너 운 좋은 줄 알라”며 지금의 남산 1호터널 근처로 데려가더니 “여기서 있었던 일은 나가서 얘기 안 하는게 좋지 않겠냐”며 반협박 반회유를 받은 뒤 중부경찰서에서 서대문 구치소로 수감됐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위해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무료변론을 하면서 그의 수배 생활도 그제서야 끝이 났다.


내가 본 전직 대통령 YSㆍMB=이후 그가 찾아간 곳은 DJ계가 모이던 동교동이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와는 자신과 결이 맞지 않았다. 이에 비해 YS의 상도동은 분위기가 보다 자유분방했다. 그리고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국장을 하던 친구가 홍보 담당을 맡고 있던 차에 자신을 도와달라고 해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사무실에 자원봉사 개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선거를 앞두고 유인물 제작 수요가 넘쳐났다. 출판사일을 해본 그는 업자들이 엄청난 가격 뻥튀기를 하고 있다고 보고 120여군데 업체를 불러 가격 담판을 벌였다.

이를 유심히 지켜본 이가 당시 통일민주당 제정국장이던 김무성 의원이다. YS가 대선에서 2위로 떨어지고 비서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YS의 비서이던 박종웅 전 의원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제도권에서 일할 생각이 없던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고 다시 박 전 의원을 만나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이 구치소에 있을 때 옥바라지를 했던 여자 후배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었는데, 이 후배의 집에서 운동권은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YS 비서실이다. 그러나 결국 그 후배와는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아내는 3당 합당 뒤 YS가 여성정책을 강화하겠다고 해서 공개채용한 여성정책비서관이었다. 그는 “당시 추천을 받아서 채용하자고 주장했지만, 대외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채용 광고 문안을 직접 작성했다”며 “결과적으로 정병국 와이프 공모가 된 셈”이라고 웃어보였다.

비서라고 하지만 정 의원이 처음 한 것은 손님들이 찾아오면 구두를 정리하고 전화를 연결하는 소일이었다. 그러나 밤늦게 전화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을 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 의원은 “YS가 인터폰으로 사람을 찾으면 서로 받기를 꺼려했지만 나는 일부러 인터폰앞에서 대기했다. 누가 온다고 하면 올려보내고, 찾아오는 사람중에 모르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확인했다. 그렇게 정치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그가 기억하는 YS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말을 다 하지 않는다. 딱 한두마디 하는데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다. 자칫 잘못하면 못 알아듣기 일쑤다”고 했다. 그러나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3당합당이 있고나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박철언 전 의원하고 갈등이 심했다. YS가 마산에 내려갈 준비하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김윤환 전 의원을 찾아가고 박태준 전 회장을 찾아가 상황을 반전시키는 걸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최근 ‘정치보복’ 발언은 한 MB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경험을 하신 분”이라고 했다. 그는 “학생운동에서부터 세계적인 대기업의 회장까지 현장에서 너무 많은 경험을 한 것이 어떻게 보면 그분의 장점일수도 있고 그분의 단점일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장관도 하고, 당의 입장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 서민행복추진본부장으로 참여해서 보면 MB는 얘기를 끝까지 다 듣는다. 그런데 다 듣고 마지막에는 본인 의사대로 결정한다”고 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하면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참모들에게 어떻게 보면 말할 기회나 건의할 수 있는 걸 결과적으로 막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많이 아는 것을 드러내는 것도 지도자로서의 덕목은 아닌 듯 했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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