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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일선 경찰관보다 솔직하지 못한 前 경찰청장
“상관의 명령을 성실하게 이행했을 뿐인데 유족에게는 엄청난 아픔을 주었고, 한 가정의 가장인 저희는 평생직장을 잃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고(故) 백남기 농민 사망 당시 살수차를 운용했던 두명의 경찰관이 서울중앙지법 제 42민사부에 제출한 ‘청구인낙서’의 일부분이다. 민사 소송에서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원고 측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청구인낙은 막대한 손해배상액이 걸린 민사소송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다.

윗선의 명령에 따라 민중총궐기 진압에 나섰던 일선 경찰관이 일신 상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순간에도 당시 지휘 책임을 지고 있던 강신명 전 경찰청장과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은 사과는 커녕 공식적인 입장 표명 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청구인낙서를 제출한 것은 비단 두 경찰관만이 아니다. 신윤균 당시 제4기동단장이 뒤이어 청구인낙서를 제출했고 이철성 경찰청장은 경찰개혁위원회에 “국가 차원에서 청구인낙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국가가 개인이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청구인낙서를 제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소송에서 피고가 된 ‘대한민국 외 5명’ 중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유족들의 사과와 배상 요구를 나몰라라 하는 피고는 이미 퇴직한 강 전 청장과 구 전 서울청장만 남았다.

강 전 청장은 지난해 9월 백남기 청문회에서 “사람이 다쳤거나 죽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힌 이후 이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없다.

두 사람이 ‘버티기’ 모드에 들어가면서 부하직원과 경찰 조직, 국가에 부담을 떠넘기는 형국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가장 큰 책임이 두 사람에게 있다고 보고 있다.

민중총궐기 당시 강경진압의 기조를 정하고 살수차의 현장 배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피치 못한 상황에서 인명 손상의 우려가 없도록 살수차를 적절한 절차와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지침을 마련하고 감독할 ‘지휘책임’을 최종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이들 지휘부이기도 하다.

이에 정의당은 이날 대변인 논평을 통해 “이제 경찰 스스로 책임을 인정한 만큼 직접 나서 진상을 밝히고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 당시 수뇌부에 대한 책임도 제대로 물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인명 사고가 벌어지자 이들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했다. 지난 13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진행된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백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한 직사살수를 명령한 지휘자가 누구냐를 두고 설전이 일었다.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의원은 사고 직후 작성된 청문진술조서 등을 근거로 공춘학 당시 서울경찰청 장비계장이 살수 시작과 종료를 지시한 지휘관으로 지목했다.

이에 공 계장은 “전반적으로 구두로 지시한 건 맞지만 버스 차량 지붕 위를 이동하며 상황을 관리해 백 농민이 쓰러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공 계장이 직접적인 살수를 지시한 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 의혹은 더욱 커진다. 당시 살수차 운용지침은 지방청장, 관할서장 또는 그 위임을 받은 현장 지휘관이 살수차의 사용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직사살수를 결정한 최종 결재권자는 공 계장보다 더 윗선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청이 공 계장의 존재를 감추고 청문보고서를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부에 제출하지 않고 버텼던 것이 강 전 청장과 구 전 서울청장 등 지휘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백남기 농민 사망사고는 11월 출범하는 경찰인권침해진상조사위원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조사에 착수할 기본권 침해 사건 중 하나다. 이 청장 역시 진상조사위원회가 요구하는 어떤 자료제출 요구나 경찰관 조사도 받아들이겠다고 한 만큼 무리한 진압이 백 농민의 사망에 이르는 과정이 곧 만천하에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강 전 청장과 구 전 서울청장이 어떠한 과오를 범했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도 막바지에 이르러 곧 책임자들을 기소할 것으로 알려진 만큼 형사책임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유족과 국민들은 모든 진상이 드러난 뒤에야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는 전직 경찰 수장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직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밝히고 용서를 구할 때 고백의 가치가 바래지 않을 것이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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