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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전중단 그후, 신리마을 르포] “일자리 창출한다면서, 멀쩡한 근로자 ‘강제해고’라니…”
-‘일자리창출 역행’ 강한 거부감…1000여명 근로자 격앙
-공론화 과정없는 기습결정…식당가ㆍ원룸 등 폐업위기
-근로자들 급여 보전 등 요구하며 정부결정 예의주시


[헤럴드경제(울산)=이경길 기자]”일자리 창출한다고 추경 협조해달라는 정부가 근로자 1000명의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뺏아갈 수 있나?”,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확실한 대책, 가이드 라인 하나 세워놓지 않고 공사를 중단시켜버리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한수원 이사회의 ‘기습 결정’이 내려진 14일과 주말. 신고리 5, 6호기 인근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리마을은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가 사흘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주말인데다 일거리마저 끊기자 사람은 더더욱 보기 힘들었다. 인근에서 만난 몇몇 근로자들은 거친 언어를 쏟아내며 정부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원전이 정말 위험하고 해로운 거라면 문닫는 게 맞다. 전문가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당연히 동의한다”는 신모(52)씨는 “하지만 과연 원전이 그만큼 문제가 되는지? 그렇다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게 공청회라도 한번 열어봤는지 되묻고 싶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사진설명=신고리 5, 6호기 건설현장이 있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일대. 뒷 편 끝으로 크레인이 있는 현장이 보인다]

건설현장 근로자들 ‘집단 멘붕’…급여보전 등 요구 벼랑끝 버티기=주말에도 현장에 출근했다는 근로자 박모(55)씨는 ”공사가 중단됐는데 뭐 딱히 할 일이 있겠나?“며, ”대부분 근로자들이 현장 정리와 정비, 청소 등으로 시간을 때우고 일찌감치 퇴근했다“고 했다.

퇴근 후 신리마을 방파제를 서성이던 근로자 한모(57)씨는 ”무슨 방법이 있겠나? 회사에서 어떤 입장도, 발표도 나온 게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삼성, 한화, 두산 등 협력업체 대표가 접촉하고 있다하니 그저 지켜볼 수 밖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씨는 신고리 3, 4호기와 울진 1호기를 거쳐 다시 신고리 5, 6호기 건설현장에 뛰어든 베테랑 근로자다. 그는 “다른 현장에 비해 수당은 약하지만 이 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 퇴직금, 4대보험 등이 있다는 이유로 원전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신고리 5, 6호기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대략 1000여명. 3개월간 건설이 중단됐지만, 공사중단 당일도 890여명의 근로자들이 정상 출근했다. 새울본부 관계자는 “최대 3000여명의 근로자가 현장에 투입될 때도 있지만, 보통 1000여명의 근로자들은 늘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씨는 “3개월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해주느냐가 중요하다. 급여를 보장해 주든지, 아니면 향후 일자리를 약속하지 않으면 근로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격앙된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사진설명=빽빽하게 들어찼던 건설 현장 식당 ’함바’가 3주만에 텅 비고 말았다. 수북이 쌓인 그릇이 눈길을 끈다]

식당ㆍ원룸 등 장사접고 마을 떠나는 사람도=불똥은 인근 식당가, 원룸과 숙박시설, 목욕탕 등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먹고 사는 신리 주민들에게 튀었다. 수백, 수천명의 근로자들로 붐비던 이 곳 마을은 인적마저 끊기고 공사중단 3주만에 생계까지 걱정해야 하는 딱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현장 근로자들로 성업중이던 이른바 ’함바(현장식당)‘들은 하루아침에 손님을 잃었다. 하루 평균 400~500명이 붐볐던 ‘B 식당’은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6명이 일하던 식당에 한명의 종업원만 남겼다. 그나마 잔류하는 근로자들의 밥을 대기 위해서다. 공사현장을 오가던 차량도 인근을 지나치던 사람도 뚝 끊겼다.

신길마을에서 10년 넘게 ‘함바‘를 운영한다는 김모(60ㆍ여)씨는 “지난달 27일 공사 일시중단 얘기가 나오고부터 손님이 줄기 시작하더니 이제 하루종일 30명도 보기 힘들다”며, ”공사중단 3개월 동안은 아예 문을 닫을 작정“이라고 털어놨다. 김씨에 따르면 인근에 수억원을 들여 ‘함바’를 짓던 사람도 공사를 중단했고, 20여개에 달하는 ’함바‘ 중 마을을 떠나기로 한 결정한 사람도 다수다.

숙박업을 하던 원룸과 숙소형 식당 업주들도 불면의 밤을 지세고 있다. 공사중단 얘기가 나돌면서부터 한 건물에 15~18개 이상 방을 가진 원룸도 30% 정도 방을 뺐다. 원룸주인들은 “빚을 내 원룸을 지었는데 3개월 후 모두 공실이 되면 그땐 어떻게 해야하나?”라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가족전체가 이사를 온 근로자들은 허탈감이 더하다. 퇴근 후 근로자들이 이용하던 마을 목욕탕도 손님이 절반으로 줄었고, 인근 당구장, 수퍼 등도 손님 발길이 뜸해졌다. 

[사진설명=원전 후문 인근 신리마을 입구에 메달린 플랜카드들.]

“국가이슈에 힘없이 매몰됐다”=원전공사 중단결정에 대해 한수원 노조와 지역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기습적인 이사회 의결은 무효”라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주민 대책위원회도 “정부가 법에도 없는 결정을 하고 노조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사회를 강행했다”며 성토하고 있다.

김기현 울산시장은 “군사 작전하듯이 졸속 결정을 할 게 아니라, 심도있는 토론과 논의를 거친 다음에 결정해야 될 사안”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울산 울주군 서생면 사업자협의회 김하섭(53) 회장은 ”덤프 등 중기를 취급하는 100여명의 근로자들도 이번 보상에 포함해야 한다“며, ”원전에서 일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이들을 빼고 협의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또 “이 곳 주민들은 무슨 죄가 있나? 주민들에게도 3개월간의 피해보상을 함께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또 다른 주장을 펴 눈길을 끌었다.

“하루아침에...어떻게 이럴수가 있나?...”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다. 더욱이 울주군민의 자율유치 신청으로 추진한 국내 첫 원전사업이라는 점에서 주민들의 상실감이 더 크다. 정부정책이라 어떤 식이든 결론은 나겠지만, 정작 피해와 고통을 떠 안는 건 ’우리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지역과 원전이 상생할 수 있는 신고리 5, 6호기 중단없는 건설을…” 마을 입구 2차선 도로에 펼쳐진 플래카드가 그들의 가슴앓이를 여과없이 털어낸다. 신리마을은 신고리 5, 6호기 건설현장 후문에 위치해 있다. 아름답고 조용한 한 바닷가 마을이 국가적 이슈에 ‘풍덩’ 빠지면서 주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hmd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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