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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돌림·협박에 학업중단…청소년 성소수자 ‘아웃팅 공포’
끈으로 묶고 게이라고 써놓고…
구타는 물론 “죽이겠다” 협박도
성소수자 절반이 괴롭힘 경험
20%는 못견디고 자살시도도


#1.기원(가명ㆍ19) 군은 중학생 시절 친구들에 의해 거리 한복판에 놓인 전봇대에 묶였던 날의 악몽을 잊을 수 없다. 기원은 결박된 채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학교 밖으로 자신을 끌고 나가 끈으로 낡은 나무 전봇대와 묶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희뿌연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기름통을 들고 다가왔다. 이윽고 자신의 머리위로 쏟아진 액체가 몸을 적실 때 기원은 온몸이 오염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사건은 기원이 평소 가깝다고 느꼈던 한 친구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며 ‘커밍아웃’을 하자, 그 친구가 곧장 ‘아웃팅(개인의 성정체성을 본인이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 폭로)’ 하면서 벌어졌다. 기원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순식간에 전교에 퍼졌고, 학생들로부터 끊임없는 구타는 물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당했다. 결국 기원은 고교 진학 직후 자퇴했다.

#2.고등학생 동성애자 연우(가명ㆍ17) 군도 또래 친구에게 아우팅을 당했다. 아웃팅 이후 친구들의 혐오와 폭력은 일상이 됐다. 필통에다가 립밤을 넣어두면 누군가가 책상에 립밤을 짜서 ‘게이’라고 써놨다. 연우가 수행평가 발표를 하면 “아 XX 보기 싫다”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친구도 있었다.

17일 일선 학교 및 인권단체 등에 따르면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다른 집단에 비해 폭력과 차벌에 훨씬 더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정체성이 밝혀지는 ‘아웃팅’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의 경우 극단적인 따돌림과 괴롭힘 끝에 학업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14년 발간한 ‘성적지향ㆍ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 청소년 200명 가운데 108명(54%)이 ‘다른 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차별 및 괴롭힘을 경험한 청소년 가운데 58.1%는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자살 시도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청소년도 19.4%에 이르렀다.

김지혜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와 정민석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 등이 참여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 친화적 환경 구축을 위한 기초조사’에서도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아웃팅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팀이 청소년 성소수자 15명을 상대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학교에서 혐오 폭력을 경험한 대다수의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죽고 싶다’, ‘상처 받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현재 15명의 학생 중 4명은 고등학교를 자퇴한 상태다. 청소년 성소수자는 청소년기라는 발달적 특성과 성적 정체성을 동시에 형성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심리ㆍ사회적 문제에 더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성소수자들 역시 아웃팅에 대한 공포는 계속됐다. 지난해 10월 질병관리본부가 19~59세 남성 동성애자 87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아웃팅을 당한 남성 동성애자가 자살 생각을 할 위험성’은 ‘커밍아웃 계획이 없는 남자 동성애자’의 5.2배에 달했다.

노충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성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은 청소년들의 경우 성소수자 친구들을 더 심하게 놀리고 차별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라며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내적으로도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 있고, 외부적으로도 친구나 부모님과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불안과 우울, 심각하게는 자살 충동을 다른 연령대에 비해 크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 교수는 “청소년 아웃팅의 경우 동성애에 대한 혐오 심리를 바탕으로 당사자에게 수치를 주려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 장난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며 “어린 나이부터 타인의 성적 지향을 자기 마음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차별일 수 있다는 기본 인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동윤·박로명 기자/realbighea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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