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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이 책!] 길위서 만난 보통사람들 인생 통해 평등 위한 여성운동가 성장 ‘뭉클’
책 편집을 하다 보면 유독 애정이 가는 원고가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길 위의 인생’ 번역 원고를 받아 60년 전 불법 낙태수술을 도운 영국의사에게 바치는 헌사의 첫 문단을 읽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건 다른 이야기다!’ 교정을 보며 몇 번이나 멈추었다. 울 시간이 필요했기에. 특히 최초의 체로키 인디언 여성 추장 윌마 맨킬러와의 우정을 다룬 장은 그 어떤 우정에 관한 작품 못지않은 울림을 안겼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 관한 서평들을 읽으며, 울고 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읽고 나서 다시 또 읽고, 이 책을 읽고 난 자신은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들을 읽으며,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한 이후에도 그는 직장을 갖지 않았다. 여름이면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지어 지내며 부두에 간이 댄스홀을 만들어 운영하다 찬바람이 불면 먼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과 즐길 수 있는 것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불쑥, 때론 밥을 먹다 만 채 차에 가족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아내와 두 딸. 가족은 길에서 골동품을 사고팔아 여비를 마련하며 여행을 이어갔다. 작은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도로 표지판으로 글을 깨치고 차에서는 책만 읽었다. 창밖을 좀 보라는 엄마에게는 이렇게 대꾸했다. “한 시간 전에 봤잖아요!” 그러다 예쁜 집들을 지날 때면 속도를 늦추라며 그 집에서 살고 싶다고 소리치곤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두가 집이 있어. 나만 빼고.” 여성이 직장을 갖기 어렵던 시절 아내는 남자이름을 가명으로 써가며 기자로 일했으나 결혼 후 그만두었다. 우울증에 시달렸고 어린 딸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한 번도 꿈을 실현한 적 없는 아버지와 꿈을 추구할 수조차 없던 어머니. 페미니즘의 대모, 아이콘, 선구자로 불리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부모다. 간단히 “불우했다”고 정리되곤 하는 글로리아의 어린 시절은 그러나 그녀에게 ‘길’과 ‘여성의 삶’이라는 두 가지 인생의 씨앗을 남겼다.

‘길 위의 인생’은 저널리스트로, 조직가로, 길에 나서 듣는 자로 살아온 글로리아가 구상에서 집필까지 20년에 걸쳐 완성한 회고록으로 한 여성이 경험한 길의 역사와 현대 정치·시민운동의 역사를 중첩시켜 조명한다. 글로리아의 성장과 더불어 평등을 위한 여성운동의 성장을 다룬 흥미진진하면서도 뭉클한 글 속에 길에서 일어난 놀라운 만남이 어떻게 그 두 가지를 가능하게 했는지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 늘 집을 동경하던 글로리아에게는 이제 집이 있다. 이번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글로리아를 인터뷰한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원 현경 교수는 그 집을 “서로 다른 여러 모습의 아픔과 희망들이 잠시, 때로는 오래 쉬어가는 주막집 같다”고 했다. 현관문을 열면 노숙자가 자고 있고, 이집트의 길거리에서 데려온 한 발 잃은 고양이가 다가오기도 한단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성운동가, 학자, 예술가들이 오래된 가족처럼, 부엌에서, 서재에서, 정원에서 편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다는 곳. 글로리아는 말한다.

“나는 길에 오를 수 있다. 집에 돌아올 수 있으므로. 나는 집에 올 수 있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므로.”

학고재 편집부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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