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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영화X정치]헌법과 증언, 블랙리스트-조윤선과 트럼보의 경우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증인, 맞습니까 아닙니까?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의원님, 제가 준비한 성명서를 읽어도 될까요?”

“안됩니다.”

“그럼 제가 쓴 글을 보여드릴까요?”

“안됩니다.”

“그럼 제가…”

“됐고, 묻는 말에나 답하시오. 맞습니까? 아닙니까?”

“제가 범죄를 저질렀나요? 그렇다면 증거는 뭐지요?”

“증인,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란 말이요!”



대화의 앞 부분만 보자면, 마치 지난 9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제7차 청문회에서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이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을 다그쳤던 장면같다. 당시 이 의원은 18차례나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를 추궁한 끝에 “사실이라는 판단이 든다”는 조 장관의 답변을 얻어냈다. 조 장관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관리를 주도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17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소환됐다.

사실 위 대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트럼보’ 속 한 장면이다. 1952년 미국 국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무려 64년간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정부가 작성한 문화계의 이른바 ‘빨갱이’(공산주의자 혹은 좌파) 명단’, 즉 ‘블랙리스트’를 주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입장은 정반대다. 미국에서 증인을 다그친 것은 1947년에 구성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였다. 증인은 공산주의 활동 혐의를 받던 영화인들이었다. 반미조사위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그 명단에 오른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 구성됐고, 최순실 국조특위는 블랙리스트의 작성을 주도한 정부 관료의 역할 규명과 처벌이 목적이었다.

영화 ‘트럼보’는 1950년대 최고조에 이르렀던 미국의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을 배경으로 했다. 반미조사위는 할리우드의 영화인들을 청문회로 불러내 공산주의 활동을 자백하고 동료들을 고발하도록 했다. 수많은 이들이 동료를 고발한 배신자가 돼야 했고, 증언을 거부한 이들은 감옥에 가거나 망명했다. 



이 때 마지막까지 증언을 거부했던 이가 ‘트럼보’의 주인공이자 ‘로마의 휴일’ ‘스파르타쿠스’ 등으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다. 그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최고의 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자신의 신념을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화계의 냉대와 여론의 비난이었으며 차디찬 감옥행이었다. 일도 완전히 끊겼다. 영화는 그가 가족을 위해 가명을 써 가며 정부 몰래 싸구려 영화 시나리오까지 인쇄기로 찍듯 써내려갔던 시기를 인상적으로 담아냈다. 그는 11개의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 가짜 이름 중 하나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상 수상자 명단에 올랐다.

그의 증언 거부는 미국 정부의 반공주의에는 반하는 행위였지만, 헌법이 규정한 미국사회 최고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 보장이다. 영화 ‘래리 플린트’에서 포르노업자를 보호했던 조항이기도 하다. 우리 헌법으로는 제21조와 가장 가깝다.

트럼보의 행위는 고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지키기 위한 ‘당당하고 아름다운 증언거부’였다. 그 후 60여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국회 청문회에서도 일부 증인들의 증언 거부 혹은 허위 증언이 재현됐으되,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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