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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영화X정치] ‘탄핵 다음 침공은 어디?’…개헌일까 아닐까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마이클 무어 식으로 말하자면, ‘탄핵, 그 다음 침공’이 문제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가 최근작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말하는 의미대로라면, 우리가 누리는 헌법과 현대민주주의제도,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 모두가 서구에서 기원했으니 ‘침공’의 결과물일 터. 대한민국은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넘어 다음의 ‘침공지’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대통령의 탄핵과 퇴진 이후의 국가적 의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다.

하긴 대통령 탄핵을 이룬 촛불시위마저 서구에서 ‘빼앗아’ 세상을 밝힌 것이 아닌가. 죽은 자를 위로하는 관습도 외국의 문물이고, 그것을 정치적 항의와 주장의 상징물로 해 온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 처음이 아니었으니 ‘촛불시위’ 역시 침공의 산물이다. 마이클 무어가 ‘다음 침공은 어디?’에 한국을 넣었다면 촛불시위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가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다음 침공은 어디?’



다큐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Whereto Invade Next?)는 ‘침공’이라는 말의 의미를 비틀어 미국이 개입한 전쟁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세계 각지의 전쟁에 개입하고 외국을 침공했지만 제대로 된 승전과 전리품은 없었다. 그러자 위기에 봉착한 미국 국방성이 마이클 무어 감독을 불러 도와달라고 한다고 한다. 마이클 무어는 외국을 ‘침공’해 진짜 제대로 된 것들을 빼앗아 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마이클 무어에게 ‘침공’이란 외국을 방문해 ‘좋은 제도’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는 유럽과 아프리카 등 9개국을 ‘침공’해 미국에는 없는 여러 제도를 ‘빼앗아’ 오기로 한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연간 8주간의 유급휴가와 한달 월급만큼의 휴가수당, 프랑스 초중고생들의 호텔 정식 수준 급식 및 선진적인 성교육. 숙제없이도 세계 최고 성적을 내도록 하는 핀란드의 공교육 제도,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개방된 슬로베니아의 대학 무상교육, 재소자들의 인권과 사회 복귀에 초점을 맞춘 노르웨이의 수감제도, 튀니지와 아이슬란드의 높은 양성평등 및 여성인권 수준. 이런 것들이 마이클 무어가 ‘성조기를 꽂고 빼앗아오는’ ‘전리품’이다.

마이클 무어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의 관객과 국민들에게 미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국가적 의제를 제시한다. 노동, 교육, 여성, 사법 등 전 사회 분야에서 미국이 한 걸음 전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호시탐탐 세계의 분쟁에 개입해 떡고물이나 챙길 음흉한 생각이나 하지 말고, 국민들이 살만한 나라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라는 게 미국 정부를 향한 마이클 무어의 메시지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나 잘 일하고 잘 놀고, 좋은 교육과 급식을 받고,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니 국가에 당당히 요구하라는 것이 마이클 무어가 관객과 미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탄핵, 다음의 침공은 개헌?

‘탄핵 그 다음의 침공’에 대해 정치권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개헌’이다. 여전히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이제 탄핵으로 됐고, 촛불의 힘을 개헌으로 모으자”라고 정치권의 상당 세력들이 주장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도,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도, 손학규ㆍ정의화 등 이른바 원외 제3지대 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개헌이 바로 촛불민심을 받드는 길”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같다. 새누리당 내 친박에서 비박, 더불어민주당 일부, 국민의당 등 야권까지 아우른다. 대선 시기와 관련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들은 “바뀐 헌법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가장 좋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친박과 비박, 민주당 비주류, 국민의당 전반의 분위기는 “대선 전에 꼭 개헌”의 의지가 강력하다. 민주당 주류나 문재인 전 대표도 원칙적으로는 개헌에 대해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대선 전 개헌 반대”다.

헌법은 바꿔야 한다. 국민의 기본권부터 행정, 입법, 사법에 대한 각종 체계까지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한다. 다만 문제는 이 녹록치 않은 작업을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대선 전의 ‘시한부’로 해야 되느냐에 여론과 정치권의 이견이 있다. 특히 정치권이 논의를 집중하고 있는 권력구조 개편은 정치세력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문제다. 개헌에 따라 각각 세력의 집권가능성이 달라진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헌법이 자칫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와 맞바꿔질 수 있다. 현재 개헌 논의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대선 전 개헌을 주장하는 모든 정치세력의 주장과 논리는 사실상 동일하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와 최순실 국정농단의 근본 원인이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대한민국 헌정사상 모든 대통령이 임기말의 측근 비리와 국정운영 실패를 겪었다는 것이 강력한 논거다.

과연 그럴까.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와 최순실 국정농단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 제왕적 대통령제이기 때문일까? ‘한 걸음 더’ 들여다봐야 할 질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를 제왕적 대통령제의 탓으로 돌리는 주장의 가장 큰 함정은 한국 사회의 지배층과 지배 구조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현재의 헌법은 엄연히 3권 분립을 기초로 하고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각종 견제와 균형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최순실 국정농단이 이뤄지는 동안 모든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치ㆍ경제ㆍ사법의 엘리트는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한 것처럼 부당한 권력을 분점했을 뿐 견제하거나 개혁하지 못했다. 여기에 동원됐던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다시금 이원집정부제든 내각제든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점한다면 한국 사회의 개혁은 또 다시 좌초한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한 개헌론 세미나에서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고찰하고 4년 중임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분권형), 내각제 등 다양한 대안적 권력구조형태를 살폈다. 그러나 강 교수는 대선 전 개헌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특히 지금 상황에서 정치권이 개헌 논의를 이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단기적인 정치적, 정파적 이해관계에 논의가 국한될 가능성도 지적했다. 차기 대권 주자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차기 정부하에서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방향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강 교수의 결론이다. 



▶‘이게 나라냐’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로, 개헌이 아니라 ‘가치’

마이클 무어가 우리말을 알았더라면 아마 조국인 미국을 향해 ‘이게 나라냐’ 고 했을 것이다.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다른 나라들과 비교된 미국이 그렇다. 휴가나 휴가수당이 사회제도로 보장돼 있지 않다. 사용자와 노동자들의 계약에 달렸다. 그 결과 미국의 노동자들에겐 유급 휴가가 아예 없거나 많아야 2주 정도다. 미국 학생들의 급식판엔 피자나 햄버거, 감자튀김으로 채워지기가 일쑤다. 금욕을 강조하는 성교육을 받으면서도 10대 임신율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대학 등록금이 너무 높아 졸업 후에도 다들 빚의 노예가 되곤 한다. 세계의 금융위기를 몰고 온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전혀 단죄되지 않았다. 재소자들에겐 몽둥이질과 발길질같은 폭력이 예사다. 마약단속과 징역제도는 흑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 됐다. 다국적 기업들은 수감 중인 흑인 노동력을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얻어낸다. 마이클 무어는 현대판 노예노동이라고 부른다.

우리 국민들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박 대통령 탄핵 국면이었던 지난 두달간 “이게 나라냐”고 참 많이 한탄했다. 이어 최근의 국회의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와 집권 여당의 행태를 지켜보며 드는 질문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것이었다. “이게 나라냐”고 한탄할만큼 형편 없는 국가와 정부는 바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되물어볼만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이 돼 왔다.

▶존엄을 위한 ‘침공’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는 다양한 국가들을 유람하며 겉이 번드르르한 제도를 ‘쇼핑’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각종 복지ㆍ교육ㆍ인권보장 제도의 유무를 넘어선다. 문제는 사회제도가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원리라는 점을 마이클 무어는 작품에서 뚜렷이 보여준다.

독일이 나치의 역사를 후세대들에 교육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을 통해 마이클 무어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에 대한 살육의 역사를 가르치지도 성찰하지도 않는 미국을 비판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이클 무어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찾아가 동서 냉전 붕괴의 거대한 역사가 한 두 사람의 망치질로 시작됐음을 강조한다. ‘골라 먹기 좋은 각종 제도’ 사이 사이에 마이클 무어가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피흘리고 싸워왔던 사람들이다. 사회 제도를 이루는 인간 존엄의 원리와 스스로의 존엄을 증명하기 위해 벌여왔던 이들의 고귀한 투쟁이다.

결국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가치’의 문제다. 대통령제냐 분권형이냐 내각제냐는 문제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누가통치권력을 위임받을 것인가의 문제이고, 헌법의 원리는 어떤 가치여야 하느냐의 문제다.

국정농단의 한 축이었거나 국정농단을 방기했거나 국정농단을 자초한 이들이라면 어떤 형태로라도 권력 분점의 일원이 돼 서는 안된다. 개헌과 개혁의 의제는 상실된 국민 주권의 원리, 그리고 정치ㆍ경제ㆍ사회 정책 및 제도에서의 인간 존엄의 원리들의 복원이 돼야 하지 않을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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