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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꿈꾸던 문학소년 ‘당뇨병 名醫’ 되다
학교에서 배운 의학지식 맹신하다 크고 작은 실패…문학적 상상·열린 생각 의술에 접목…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당뇨병센터장의 인생스토리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두 개의 시간이 있었다. 그저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와 인간이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물리적인 시간을, 카이로스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같은 24시간을 살더라도 어떤 이가 느끼는 24시간과 다른 어떤 이가 느끼는 24시간의 속도감은 다르다. 바꿔 생각해보면 크로노스의 시간은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와 다른 직업을 갖고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은 크로노스의 결과라기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굳이 그리스의 시간 개념을 언급했던 것은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가 인터뷰 내내 보여준 고전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보인 문학적 관심은 의사라는 직업과는 다소 동떨어진 듯 보인 탓도 없지 않다. 카이로스에 대한 그의 해석이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지게 했다. 특히 학창시절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했고, 인터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그의 얘기에 귀기울이게 했다.

▶감수성 풍부한 ‘고등학생 안철우’=고등학교에 진학한 안 교수는 문예창작반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문과로 진학할 생각이었다. 안 교수는 “누구보다 문과 성향이 강한 학생이었다. 다니던 고등학교가 1학년 때 문ㆍ이과를 나누는데, 큰 고민 없이 문과를 지원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안 교수와 온라인으로 먼저 인사를 했을 때도 “예전에 습작한 시인데 오늘처럼 비가 오면 슬그머니 계절이 바뀌니까 생각이 난다”며 자신이 쓴 시를 보내 줬다.


문학반 활동 외에도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배웠다. 안 교수는 “학원 선생님이 다들 입시를 위해 학원을 다니는데, 너는 뭐하냐며 돌아가라고 한 기억이 있다”며 “이젤과 화구를 들고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문학ㆍ예술에 대한 갈망은 그 당시 학생들이 으레 그랬듯 부모님이 원하는 이과로 진로를 바꾸면서 꺾일 법도 했다. 그러나 안 교수의 감수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세대 의과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생각에 비올라를 배우러 다녔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휴학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대신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로 했다. 안 교수는 “진로에 대한 큰 고민이 없었는데 막상 대학이란 곳에 와 보니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수련을 마치면 의사가 될 것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미래가 앞에 펼쳐질 테지만 그것이 진정 내가 갈 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문사철(文史哲, 문학ㆍ사회ㆍ철학을 줄여 부르는 말)’에 대한 갈증이 심했을 때 선배들의 공연은 굉장한 감동이었다”며 안 교수는 흥분했다.

다음달 열리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공연 얘기를 꺼내자 그의 음악 얘기는 계속됐다. 안 교수는 “음악은 나에게 정신적 안정을 찾게 해 주는 매개체다. 특히 비올라의 저음은 첼로처럼 묵직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며 “아이들이 악기를 배우게 한 이유는 선율 자체도 좋지만 사람들과의 어울림이라는 장점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연함은 사고의 외연을 넓힌다=의과대 4학년이 되면 전공과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안 교수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미 자신은 내과가 체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1학년 때 방황도 했지만, 의사라는 직업을 간다면 내가 갈 과는 내과라고 확신했다”며 “그중에서도 내분비내과가 가장 적성에 맞고 이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갈 생각이 확고했다”고 했다.

내과 중에서도 내분비내과는 질병 자체의 모호한 특성에다 안 교수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만 해도 호르몬에 대한 학계 연구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크고 작은 실패들이 불가피했다.

안 교수는 ”할머니와 둘이서 생활하는 15세 당뇨병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는데,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인한 당연한 증상이었지만 항상 졸려 하는 모습을 보여 주위에서 게으른 아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며 “단순히 당뇨병만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누구도 이해해 주려 하지 않았고 혼자서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던 아이는 급기야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를 떠올렸다.

안 교수에게 이 환자는 학교에서 배운 의학지식이 ‘절대적으로’ 맞고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는 후배 의사들이나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가면 된다”고. 그만큼 ‘절대 진리’를 맹신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고의 유연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 그가 요즘 빠져 있는 것이 반신욕이다. 주 2~3회, 회당 30분 정도 반신욕을 즐긴다. 반신욕이라고 하면 언뜻 한방에서 말하는 ‘기의 순환’이 먼저 연상된다. 한창 양방과 한방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상황인지라 우문을 던졌다.

“반신욕은 한방쪽에서 얘기하는 것 아닌가요?”

안 교수는 “반신욕의 의학적 효능은 양방에서도 충분히 얘기할 수가 있다”며 “체지방 연소와 대사작용을 활발히 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양방과 한방의 차이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은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며 “굳이 분야를 구분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 않냐”고 했다.

그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홍삼과 같은 생약 성분을 어떻게 의학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인터뷰의 끝이 보이면서 안 교수는 “각자가 속해 있는 사회의 수는 다를 수 있다. 속해 있는 사회의 숫자가 늘어날 수록 몸은 피곤하겠지만, 반대로 그로부터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며 “많은 사회를 경험한다는 건 그만큼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삶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고 말했다. 인터뷰 모두에서 그가 얘기한 카이로스 시간과 같은 맥락이다.

가족에게 한말씀 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족은 나에게 엔도르핀, 도파민, 옥시토신이다.”

엔도르핀은 뇌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며 통증 완화효과를 지닌 아편성 단백질이다. 도파민은 뇌신경 세포의 흥분을 전달하며 행복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시토신은 뇌에서 배출되며, 신뢰호르몬ㆍ사랑호르몬ㆍ포옹호르몬으로 불린다. 역시 ‘호르몬 박사’다운 대답이다. 이들 호르몬이 우리 몸에서 없어선 안 되는 것처럼 그에게도 가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이해했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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