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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기자의 일본열전]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그리고 AOA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이 순간 모두들 머릿속에 코끼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프레임을 인식한다. 인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 순간, 모두 코끼리를 연상하게 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있다.

수전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 히로시마(廣島) 방문에 “우린 어떤 상황에서든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순간, 일본은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 원폭 투하 사과”라는 도식을 성립시켰다.

오는 27일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확실해진 10일 기준으로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ㆍ닛케이)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총 42건 지면으로 보도됐다.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방문이 확실해진 10일 기준으로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둘러싼 기사가 지면에 하루에 1건은 기본으로 실렸다.

이 때 매번 등장한 단어는 “미래지향적”, “역사적 방문”, “사죄하지 않는다”, “히로시마의 비극” 등이었다. 

4월 12일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회의 이후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찾아 원폭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한 G7 외교장관들. 이날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미 현직 장관 사상 처음으로 원폭 투하지인 히로시마를 찾았다. [사진=게티이미지]

닛케이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무엇을 기대합니까”라는 제목의 앙케이트 조사 기사에 “오바마 대통령은 ‘사죄 외교’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며 “히로시마에서는 대대적인 연설을 하지 않고 대신에 성명 형태로 자신이 내세운 ‘핵무기 없는 세계’(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를 향해 핵 폐기를 호소 전망이다”며 사죄라는 단어를 우회적으로 강조했다.

도쿄(東京)신문은 “오바마, 히로시마 방문에: 일본이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 이유 원폭 ‘강화조약’에 결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미국 등 48개국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 문제는 해결하고 일본도 연합국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며 공식적인 외교채널을 통해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암묵적인 사과’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인지 가능하다.

이처럼 일본 매체는 모두 “미국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사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역으로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만으로도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는 언어의 ‘프레이밍’(인지 구성)을 통해 실제 사용한 문장의 의미와 반대되거나 숨겨진 의도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프레이밍 이론’이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예정을 다룬 일본의 언론은 “역사적 방문”, “사죄없이”, “미래지향적”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일종의 ‘각인 효과’를 누렸다. 실제로 일본 언론은 오바마 방문의 본래 목적인 “핵 폐기”ㆍ“핵무기 없는 사회”보다는 “히로시마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한 역사적 방문”ㆍ“오바마 히로시마 방문, ‘사죄는 않고’”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프레이밍을 이용한 각인 효과는 우리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아이돌 그룹 AOA의 역사 인식 논란도 마찬가지다. AOA의 멤버 중 한 명이 안중근 의사를 장난스럽게 ‘긴또깡?’이라고 불러 뭇매를 맞았지만, 가수 2명의 이름이 기사에 항상 같이 나왔기 때문에 AOA 멤버 2명 모두에게 “‘안중근=긴또깡’이라고 장난스럽게 대처했다”는 이미지가 생겼다.

16일 공개된 AOA들의 신곡 ‘Good Luck’에서 간접광고(PPL)로 나온 혼다 자동차와 도요타 자동차가 ‘전범기업’이라는 기사의 제목과 언어 선택도 “AOA는 역사에 무지하다”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공교롭게도 혼다 자동차는 전후 설립된 기업이다. 도요타 자동차도 위안부 문제 실행위원장인 재일교포 2세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의 연구와 일본의 위안부 사죄 및 개인배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인 ‘일본 전쟁책임 센터’를 후원하는 등 극우나 혐한과는 반대되는 행보를 걷고 있다.

한편,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도쿄 스포츠’는 15일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비판하는 한국 역사인식의 ‘헛소리’”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한국을 잘 아는 일본 문필가 다지마 오사무(但馬オサム)는 매체에 “한국에서는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라고 가르친다”며 “역사인식이 상당히 치우쳐져 있다. 전범(전쟁 범죄)라는 말은 있지만 전범국이라는 단어는 국제 통념 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사설은 “한국은 ‘전범국가’라는 개념을 만들어 일본에 씌우고 나치 독일과 대일본제국을 동일시하는 국제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며 “한국에서 히로시마ㆍ나가사치 원폭은 전범국에 가해져야 마땅한 처벌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히로시마 피폭자 중 한국인 피폭자는 약 2만 명에 달한다. 그렇다면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을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고 비난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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