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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예가 손정희의 ‘판도라’, 미(美)의 고정관념에 저항하다
-4일부터 30일까지 학고재갤러리서 ‘판도라’전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 버전의 ‘이브’다. 신들이 창조해 낸 최초의 여자다. 동시에 질병과 죽음, 질투와 증오 같은 해악을 가져온 여자다. ‘희망’이라는 최후의 보루만을 남긴 채 인류에게 재앙을 안긴.

도예가 손정희(41)는 판도라를 보듬었다. 인류 재앙의 근원으로 손가락질 받는 존재, 온갖 재앙이 되어 자신을 공격하는 수천마리 나방으로부터 의연하고 담대하며 여전히 아름다운 존재, 판도라를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을 드러냈다. 

‘판도라’ 앞에 선 도예가 손정희.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손정희 작가가 4년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대표작 판도라를 포함, 지난 4년동안 작업한 도예 조각작품 30여점을 들고서다. 전시는 30일까지 학고재갤러리(서울 종로구 삼청로)에서 열린다.

작가는 미국 버나드칼리지 예술사 학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도예유리과 석사 과정을 거쳤다. 그간 신데렐라, 인어공주 등 동화 속 주인공은 물론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을 모티브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인물 조각 작품을 줄곧 선보여왔다. 

이번 세번째 개인전 역시 신화 속 인물들을 주제로 했다. 인물 형상의 도예 조각들에 작가의 내면을 투영했다.

분노, 폭식, 오만, 탐욕, 색욕, 질투, 나태 등 성경에 나오는 7대 죄악을 조각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데뷔탕트:7대 죄악, 2015). 손정희 특유의 거칠고도 기괴한, 동시에 지극히 섬세하고 여성적인 인물 조각들이다. 

데뷔탕트:7대 죄악, 2015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손정희의 작품.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손정희의 작품.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손정희의 작품.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미술평론가 윤진섭(호남대 교수) 씨는 손정희를 네덜란드 초현실주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에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흙으로 빚어낸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형상들은 작가이자 투사인 손정희가 싸움에서 이긴 전리품”이라며 “전통적 미의식에 대한 항거”라고 평했다.

지난 4일 전시 오프닝날 갤러리에서 작가를 만났다. 가장 먼저 건넨 첫 마디. “작품이 너무 센 것 아니예요?”

무심하게 돌아온 대답. “제가 보기엔 세지 않아요. 더 세고 싶은데….”

그의 인물 조각들은 ‘그로테스크하다’는 평이 많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 특히 눈(目)이 살아 있다. 말 그대로 ‘화룡점정’이다. 인물 조각들과 마주할 때면 마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어떤 감정을 들킨 것 마냥 뜨끔해진다.

“괴기한 듯 보이지만 전형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매력이 있죠.”

스스로를 “덜렁거리는 성격”이라고 말했지만 작업 결과에서는 꼼꼼함과 치밀함이 드러난다. 헝겊, 실타래, 깃털 등 다양한 소재를 도예 조각에 덧붙여 장식적이면서도 풍부한 질감을 더했는데, 오랜 시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굳이 도예에 한정되고 싶지 않아요.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하자는 주의죠. 그래도 흙 만지는 게 좋으니까 그걸 버리진 않을 거예요. 흙으로 인체를 빚을 땐 제가 신이 된 기분이죠.”

손정희의 도예 조각들 중에는 반인반수도 있다. 하반신은 새의 형상이지만 날개는 없다. 날아갈 수 없는 새다. 검은색 깃털로 장식한 판도라 역시 비슷한 모습이다.

“판도라는 신들이 공들여 만든 여자예요. 언젠간 날아갈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 여자죠. 사죄해야 하는 여자가 아니구요.”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예술가가 삶에서 체득한 지혜와 굳은 의지가 판도라를 통해 발로했다. 엄마이면서 아내이고, 여자이고 동시에 ‘야성’을 간직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손정희의 모습이 판도라와 겹쳐진다.

초월적인 존재로서 판도라가 작가 자신인가를 묻자 “그게 나인가. 잘 모르겠어요”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작가. 좀 더 밝고 예쁜 도예 작품을 할 의향은 없는지 물었다. 도예라는 장르 특성상 ‘밝고 예쁜’ 작품들이 상업적으로도 잘 풀릴 수 있을 테니.

“어른들은 예쁜 거, 잘 팔릴 거 만들라고 하시는 데 전 싫어요. 내가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을 만드는 것, 작가로서 잘 나가는 것도 의미 없고요. 내 감정에 충실한 게 가장 중요하죠. 그런데 저는 제 작품이 예쁘기만 한 걸요?”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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