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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의 오늘] 혁신의 탄생, 스티브 잡스
[헤럴드경제=정찬수 기자]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서부 샌프란시스코. 미국 태생의 한 여인은 아이를 출산합니다. 아이는 이후 혁신의 아이콘이자 오늘날 전세계의 소프트웨어 산업을 주도하는 애플을 창업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시리아계 교수였지만,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헤어진 상태였죠. 아이를 기를 처지가 되지 않은 어머니는 잡스 부부에게 아이를 입양 보내게 됩니다. 잡스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스티브 잡스’라고 짓습니다.

잡스 부부는 양아들을 친자식처럼 온갖 정성을 들여 키웁니다. 하지만 천재성은 물론 친화력마저 없는 어린 잡스는 차고에 박혀 있기 일쑤였죠. 차고에 버려진 자동차ㆍ전자 부품 등이 그의 최고의 장난감이자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 진학한뒤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잡스의 천재성이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하드웨어 산업에서 주목을 받던 휴렛팩커드(HP) 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고, 졸업한 뒤엔 HP에 인턴으로 들어가죠.

인턴을 마친뒤 진학한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동양 문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철학 전공이 한 몫한 것으로 알려졌죠. 하지만 잡스는 한 학기만을 다닌채 중퇴합니다. 그는 대학생활에 대해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죠. 문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우연하게 게임회사인 아타리에 게임 디자이너로 취직합니다. 영화에 많이 나오는 전자 탁구게임인 ‘퐁(Pong)’을 만들던 게임계의 원조격인 업체였죠. 이후 HP에 재직중이던 워즈니악과 사외 클럽에서 만나 컴퓨터를 제작합니다. 1976년 ‘애플I’이라는 프로토타입이 그들의 첫 결실이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 ‘애플I’의 탄생은 혁신이었습니다. 투박한 기판이 전부였지만 그들은 이후 ‘애플II’, ‘애플II+’ 등 후속제품을 만들어 큰 돈을 벌게 됩니다.

‘애플III’의 실패 이후 잡스는 매킨토시 등 사내 다른 프로젝트를 담당합니다. 이후 팀간의 과도한 경쟁과 연봉 문제, 그리고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자신이 1985년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잡스는 함께 나온 엔지니어들을 데리고 컴퓨터 개발업체인 NeXT를 설립하고 하드웨어인 ‘넥스트스텝(Nextstep)’을 제작하죠. 이 때 인수한 회사가 ‘토이스토리’로 유명한 픽사입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이 큰 성공을 거두자 NeXT는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하지만 이 때 축적한 소프트웨어 기술력은 이후 애플에서 공개되는 iOS의 뼈대가 됐죠.

계속된 침체의 길을 걷던 애플은 넥스트스텝을 인수하며, 다시 잡스를 경영진으로 불러들입니다. 마니아들은 이를 애플의 굴욕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진행 중이던 소송을 합의로 매듭짓는 한편, 마이너스로 휘청이던 애플의 수익을 플러스로 전환시킵니다. 계속되는 픽사와 함께 성장하는 애플은 2001년 들어 아이팟을 성공시키며 혁신의 고삐를 당깁니다. 2004년 잡스는 처음으로 CEO 직함을 얻게되고 3년뒤 아이폰을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릅니다.

2004년 췌장암 선고는 혁신 행보의 유일한 장애물이었습니다. 잡스는 치료와 재활이라는 고난의 길을 걸어 많은 제품들을 선보이고,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로 생을 마감하죠. 잡스의 인간성 논란과 경영능력은 현재까지 회자되지만, 그의 창의성과 추진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적습니다. 제품과 함께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 프리젠테이션 모델로까지 이어져오는 잡스 라이프. 그의 명언 중 하나는 여전히 수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큰 귀감을 건네줍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함을 잃지마라(Stay Hungry, Stay Foolish).”

and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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