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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이슈] ‘내이름이 보증수표’…이름걸고 대박난 패션계 슈퍼리치
[특별취재팀=양영경 인턴기자]프라다 나일론백, 아르마니 정장, 랄프 로렌 폴로셔츠…. 보통 명사처럼 자리 잡은 유명 패션 브랜드 중엔 창업주나 디자이너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브랜드명이 많다. 이름을 걸고 하는 사업인 만큼 정성을 쏟아서일까. 그 이름으로부터 창출된 부는 원래 소유자를 어마어마한 억만장자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름 덕을 본 슈퍼리치엔 누가 있을까.


▶미우치아 프라다, 82억 달러(8조8000억원)=명품 브랜드 ‘프라다(Prada)’와 그 세컨 브랜드 ‘미우 미우(Miu Miu)’는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그 자체를 의미한다. 프라다는 그녀의 성이며, 미우 미우는 그녀의 애칭이다.

밀라노 국립대 정치학과 출신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6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과 여성 연맹에서 활동할 정도로 사회 참여에 열정적이었다. 사회 운동을 하면서도 스커트 입기를 좋아했고, 이브 생 로랑이나 앙드레 쿠레주와 같은 명품을 빼놓지 않았다는 건 그녀만의 개성이었다.

그녀는 세계 1, 2차 대전과 대공황으로 갑작스럽게 가업에 뛰어들면서 혼란을 겪었다. 전공과 관련 없는 가죽 제조업체의 디자이너가 돼야 했다.

프라다가 사업적으로 안정가도를 달린 건 남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를 만나면서다. 디자인을 불법으로 사용한 업체에 항의하러 갔다가, 그 회사 사장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때 프라다 가문의 노하우는 베르텔리의 사업적 수완을 만나 승승장구하게 된다. 1980년 신발 라인을 시작으로 여성복과 남성복을 아우르며, 1994년엔 뉴욕 컬렉션을 선보인 첫 이탈리아인이 됐다. 

기네스 팰트로와 미우치아 프라다 [사진=프라다 페이스북]

프라다가 열풍이 된 데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나쁜 취향’(?)이 있었다. 보기
에만 아름다운 디자인을 거부하고 밀리터리 요소와 활동성이 강조되는 디자인을 내세운 것이다.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프라다 나일론백도 군수품 제작에 사용되는 ‘포코노’를 재료로 사용해 가볍고 물에 젖지 않는 점을 강조했다. 이 독특한 스타일은 ‘프라다’라는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키면서 그녀를 자산 82억달러의이탈리아 최고 여성부호로 만들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79억 달러(8조5000억원)=국내 시중 백화점엔 아르마니(Armani) 없는 곳이 거의 없다. 아르마니 브랜드로 선보이는 품목이 정장, 시계, 화장품, 향수, 가구 등 무수히 많다.

브랜드의 시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라는 사람이었다.

의대생이었던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적성에 안 맞는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를 선택한 군인이었다. 그가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군복무 중 돈을 벌기 위해 밀라노의 한 백화점 구매팀에서 일을 하면서다. 여기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60년대엔 남성복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나선다.

아르마니는 1975년 세르지오 갈레오티(Sergio Galeotti)와 함께 조르지오 아르마니 주식회사를 차렸다. 당시 남성패션의 상징이었던 딱딱한 어깨패드를 옷에서 뺀 것은 ‘사람의 몸과 옷이 하나’된다는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 철학이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사진=아르마니 페이스북]

이후 뉴욕 바니스(Barney’s) 백화점과 손을 잡고 미국 시장에 진출해 첫 해 매출 9만 달러를 기록하며 입지를 다졌다. 특히 80년대의 아르마니는 케빈 코스트너, 숀 코너리와 같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에게 옷을 입히는 디자이너로 명성을 높였다.

최근 아르마니는 의류를 뛰어넘어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4년 상해에 오픈한 아르마니/3 온 더 번드(Armani/Three on the Bund)스토어에선 의류, 화장품뿐만 아니라 꽃, 카페, 초콜릿 브랜드도 선보였다. 2011년 개장한 밀라노의 아르마니 럭셔리 호텔도 그 계획 중 하나다.

아르마니의 사업이 무서운 기세로 확장될수록 따라오는 부도 어마어마했다. 2012년 아르마니 그룹 판매실적이 15% 높아지면서, 아르마니 개인 자산만 12억 달러가 추가됐다. 10채의 고급주택과 5000만 달러 상당의 요트는 그가 과시하는 부의 일부라고 한다.


▶랄프 로렌, 78억 달러(8조4000억원)=상류층의 스포츠로 알려진 ‘폴로(Polo)’는 랄프 로렌(Ralph Lauren)의 브랜드 폴로가 탄생한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할 정도다. 오히려 지금의 폴로는 스포츠 그 자체보다 의류 브랜드 이름으로 그 기세를 떨치고 있다.

러시아계 유태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랄프 로렌은 학창시절부터 패션 감각이 남달랐다.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이었지만, 미국 명문사립고 학생들이 입을 법한 교복 스타일을 고수하며 친구들의 시선을 모았다.

십대부터 의류산업에 종사한 로렌은 뉴욕 시립대를 중퇴한 후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뛰어들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작은 공간에서 넥타이를 만들어오다가 뉴욕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백화점의 대량 주문을 받으며 첫 성공을 맛본다. 이후 폴로(Polo)라는 이름의 넥타이가 인기를 끌면서 1968년엔 남성복으로 사업을 확대한다. 뉴욕 블루밍데일즈(Bloomingdale’s) 백화점에서 폴로 바이 랄프 로렌(Polo by Ralph Lauren)을 시작한 것이다. 

랄프 로렌과 아내 리키 로렌 [사진=랄프 로렌 페이스북]

70년대 들어와 채를 들고 공을 치려는 폴로 선수가 새겨진 여성용 셔츠와 24가지 색상의 폴로 니트 셔츠의 생산은 명성을 드높이는 기폭제가 됐다. ‘상류 사회의 라이프 스타일을 옷에 심는다’는 디자인 철학이 자연스럽게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어지면서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당시 ‘패션이 아니라 스타일이다(Style, not fashion)’라는 폴로 광고문구는 현재까지 브랜드의 모토로 남았다.

로렌은 1997년 회사가 상장된 후 81.5%에 해당하는 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 회사의 성장과 함께 모든 부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재력은 6채의 집과 대규모 목장 이외에도 관심분야인 자동차에 쏟는 돈에서 드러난다. 로렌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슈퍼카 컬렉터다.4000만 달러의 ‘부가티 타입 57SC 애틀랜틱‘(Bugatti Type 57SC Atlantic)을 포함해 총 2억 달러 가치의 자동차 17대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happyd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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