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한식당 ‘단지’와 ‘한잔’을 운영하고 있는 스타 셰프 후니 킴(한국 이름 김훈ㆍ40)이 한국을 찾았다. 한국음식을 맛보고, 힐링도 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
음식 얘기를 할 때면 후니 킴의 동그란 눈이 ‘반짝’하고 빛난다. 엔도르핀이 팍팍 샘솟는 듯한 표정이다. 세 살 때 이민을 떠나 영국에서 자랐고, 열 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 1.5세대인 그는 매년 한 차례씩 고국을 방문한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소안도, 어머니의 고향인 대구도 자주 찾았다. 그때 먹었던 한국음식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어 음식 이름을 줄줄이 꿴다. 떡볶이, 번데기, 뽑기 등 길거리 음식도 떠올린다.
“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콕 찍어 먹었던 기억을 잊지 못하죠. 떡 1개에 10원씩 팔았잖아요. 떡볶이는 통인시장의 ‘기름떡볶이’가 최고예요. 뉴욕 맨해튼에 제가 두 번째 낸 한식당 ‘한잔(HANJAN)’의 떡볶이도 서울 통인시장 같은 ‘기름떡볶이’입니다. 반숙한 계란 반쪽을 따로 곁들이는 게 다를 뿐, 맛은 꼭 같아요.”
최근 들어 전통 방식으로 빚은 된장, 간장 등 한국의 장류를 활용한 요리의 비중을 늘리고 있는 그를 포항의 산골마을 죽장면 상사리에서 만났다. 그가 포항에서도 청송 쪽으로 차를 1시간을 더 달려야 하는 오지를 찾은 것은 뉴욕 식당에서 쓸 전통 된장과 간장의 맛과 제조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한식당 최초로 미슐랭 ‘별(★)’에 오르다=요리사이자 식당을 직접 경영하는 ‘오네 셰프’인 후니 킴은 지난 2010년 말 뉴욕 맨해튼 52번가에 한식당 ‘단지(DANJI)’를 오픈했다. 이 식당은 개업 1년도 안 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레스토랑 평가지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1개를 받아 큰 화제를 모았다. 한식당이 미슐랭 스타를 받은 것은 국내외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좌석이 불과 30석 남짓해 ‘어깨를 부딪쳐가며’ 식사를 해야 할 정도인 ‘단지’는 개업 초부터 뉴욕의 음식비평가와 미식가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했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포스트 등 음식 평가에 까다로운 뉴욕 언론들이 앞다퉈 소개한 바 있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단지’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하며 ‘꼭 먹어볼 만한 요리’로 평하기도 했다.
‘단지’가 매일 밤 ‘만석’을 기록하며 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서자 후니 킴은 지난해 맨해튼 26번가에 ‘한잔(HANJAN)’이라는 보다 큰 한식당을 오픈했다. ‘한잔’의 개점비용은 ‘단지’를 2년간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충당했다. 손바닥만 한 식당의 수익으로 개점 비용을 조달했다니, 얼마나 장사가 잘됐는지 짐작이 간다. ‘한잔’ 또한 연일 푸른 눈의 손님들로 가득 차 그는 ‘한식의 세계화’를 앞장서 실천하는 셰프인 셈이다.
후니 킴은 성공 비결로 ‘과학’과 ‘정성’을 꼽았다. 과학도 출신답게 음식 또한 ‘과학’이라는 것. 레시피가 대단히 정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울러 양질의 신선한 재료를 고집하고, 인공 첨가물은 쓰지 않는 대신,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는 원칙을 고수 중이다. 이를테면 ‘단지’의 최고 인기 메뉴인 돼지고기조림의 경우 돼지고기를 익힌 후 24시간 숙성시켰다가 내놓는 식이다. 심야 인기 메뉴인 ‘라면’은 돼지뼈를 12시간 우려낸 국물로 만든다.
그는 뉴욕에서는 분초를 다투며 바삐 살아가지만 한국에 오면 조금 긴 호흡으로, 전국의 맛집을 탐험한다. 즐겨 먹는 음식을 꼽아 보라고 하자 서울 삼각지 ‘봉산집 차돌박이’, 을지로 ‘우래옥 불고기, 오장동의 ‘함흥냉면’, 강남 신사동 ‘개화옥 된장국수’ 등 흡사 맛집 가이드북을 펼친 것처럼 술술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광장시장의 마약김밥이란다.
“제게 휴식이란, 맛있는 걸 찾아 먹으러 다니는 겁니다. 새 식당 ‘한잔’을 오픈하며 방전된 배터리를 맛난 한국음식을 먹으며 완벽히 재충전했어요. 서울 강남의 제주도음식점에서 먹은 갈치구이와 조림은 환상이었습니다. ‘한잔’의 메뉴에 갈치조림을 추가하려고요.”
▶해물파전에도, 갈비찜에도 된장 한 스푼?=우리의 옛 주막처럼 술(막걸리)과 잘 어울리는 안주류 비중이 높은 2호점 ‘한잔’은 쌈밥, 된장찌개, 된장덮밥 등 강한 향의 토종 한국음식을 주로 판다. 외국인들에겐 다소 생소할 수 있고, 냄새도 만만찮아 메뉴에 ‘특유의 냄새가 나는 된장찌개’라는 식으로 미리 ‘경고’를 준다.
“잘 모른채 주문했다가 한국음식을 아예 싫어하게 될까 봐 정확히 표기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도전정신이 충만한 손님들이라 된장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더 좋아해요. 이 집 고유의 특별한 음식을 맛보게 됐다며 설레 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리곤 대부분 ‘깊은 맛이 난다’며 좋아들 하죠.”
후니 킴은 한국음식 특유의 맛을 내기 위해 전통 방식으로 만든 장(醬)을 고집한다. 한국음식은 양념 맛인데, 미국에선 좋은 양념을 구하기가 어려워 비용이 좀 더 들더라도 한국에서 공수해 쓴다. 특히 한국의 된장은 ‘강하고, 남자다운 맛’이라 요리를 잘 살려준다는 것.
그는 뉴욕에서 ‘한국음식이 건강에 좋고 맛있다’는 소문이 번지며 날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식당을 리드할 만한 매우 고급스런 정통 식당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고만고만한 음식점은 많아도 여러 면에서 ‘톱’으로 내세울만한 식당이 없는 건 아쉽다고 했다. 프랑스 요리나 일본음식처럼 ‘귀한 음식’ ‘제대로 만드는 음식’이란 이미지가 쌓여야 그 아래 중급 식당으로까지 파급력이 확산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선 우리의 입맛이 아닌, 현지인(뉴요커)들의 입맛을 제대로 파악해 이를 체계적으로 공략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후니 킴은 얼마 전 ‘한잔’에서 발행 부수 81만부에 이르는 미국의 유명 여행잡지 ‘콘데나스트 트래블러’가 주관하는 ‘글로벌 테이스팅 투어(스타 셰프의 음식을 맛보는 행사)’를 했다. ‘한식 맛의 뿌리’라는 타이틀의 이 디너 이벤트에는 미식가, 여행가, 금융인 등 44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그가 이날 선보인 요리는 고등어조림, 해물된장찌개, 한우구이 등 모두 9가지. 대부분 된장ㆍ고추장ㆍ간장으로 양념했거나 별도의 소스를 만들어 내놓았다.
그는 “불고기며 잡채, 갈비찜 등을 선보인 게 ‘한식 세계화’의 1단계라면, 2단계는 한식의 뿌리인 된장ㆍ고추장ㆍ간장으로 만든 정통음식을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랜 숙성과 발효를 거친 깊은 맛을 보여주자는 거죠”라고 했다. 1호점인 ‘단지’가 ‘불고기와 오이소박이, 파절이를 넣은 햄버거’를 파는 ‘미국식 한식당’이라면, ‘한잔’은 족발과 된장덮밥, 해물된장찌개 등을 파는 ‘정통 한식당’이다.
▶의사에서 요리사로… 길을 돌리다=후니 킴이 처음부터 요리사의 길을 택한 건 아니었다. 의사의 길로 나섰다가 셰프로 방향을 튼, 특별한 이력이다. UC버클리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원에 합격한 그는 탄탄대로가 보장된 듯했다.
“한국의 부모님들처럼 제 어머니도 의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을 갖길 원했어요. 공부를 잘해 의사의 길을 택했는데 편두통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었죠. 그래서 1년간 머리를 식히려고 프랑스요리학교 FCI(The French Culinary Institute)에 등록했죠.”
10개월간 요리를 배웠는데, 의대 대학원 재입학까지 3개월이 남아 ‘현장 경험도 쌓아 보자’라는 생각에 뉴욕의 유명 프렌치레스토랑인 미슐랭 3스타 ‘다니엘(Daniel)’의 문을 두드렸다.
“3개월간 공짜로 일하겠다고 하니 흔쾌히 받아주더라고요. 그런데 2주 후 ‘보수를 줄 테니 정식 직원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요리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어서 ‘오케이’ 했죠. 그리곤 휴학을 1년 더 연장했는데, 그때까지도 의사의 길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요리사는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꼬박 서서 일해야 하는, 무척 고된 일이다. 잠시도 한눈을 팔아선 안된다. 그런데 그 꽉 짜인 일이 정말 행복했고, 평생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극심한 두통 또한 씻은 듯 사라졌다. 하지만 예상대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들을 홀로 키우신 어머니는 요리사의 길을 택하자 1년간 말조차 섞지 않으셨다고 한다. 변호사인 아내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절벽 앞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에서 인정을 받자 어머니도, 아내도 조금씩 ‘셰프 후니’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까진 열 살이나 어린 동료들과 뒤섞이며 ‘의사를 포기할 만큼 죽기살기로 매달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의 하얀 가운 대신, 하얀 조리복을 입은 그는 다니엘에서 거의 신들린 듯 2년간 일했고, 또 다른 미슐랭 3스타 일식레스토랑인 ‘마사’에서 2년간 더 일했다. 그리곤 마침내 자신의 식당을 차리게 된 것. 그는 “한식 본래의 맛, 제대된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요리사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는 게 아니라 손님에게 자기 요리를 전하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요리에선 ‘재료가 최우선’이라는 신념의 후니 킴이 한국에서 가장 공수하고 싶은 것은 한우와 제대로 짜낸 진짜 참기름. 한우는 미국산 쇠고기보다 좀 질기지만 씹을수록 더 맛있어지는 그 오묘함이 일품이라는 것. 서울과 포항 등지를 오가며 한국의 음식을 맛본 그는 미국인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좀 더 개발할 계획이다.
“미식가들이 좋아하는 한식요리사가 되고 싶어요. 뉴요커들이 ‘아, 오늘 후니 킴의 된장덮밥이 당기는데…’ 하고 되뇌었으면 좋겠어요. 한식에 맛을 들인 미국인들이 집에서 직접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한식 재료 전문 브랜드도 만들고 싶어요. 뉴욕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탈리아 식재료 브랜드 ‘이틀리(Eatly)’가 롤모델입니다. 이곳에서 파는 치즈나 오일을 사용하면 정통 이탈리아 음식을 누구든 쉽게 만들 수 있거든요. 한식도 언젠간 가능하지 않겠을까요?”
그는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한식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을 것이라며 “항상 그리워하다 보니 그 맛의 소중함을 알겠더라고요. 저는 한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싶다면? ‘열심히 먹어 보라’=후니 킴의 명함에는 ‘모던 코리안 퀴진(Modern Korean Cuisine)’이란 표현이 담겨 있다. 전통(Traditional)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정통(Authentic)에 초점을 맞춰 창의적인 고급 한식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자신과 같은 요리사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에겐 수업료가 엄청난 유명 학원에 등록할 생각부터 할 게 아니라, 일단 주방에서 열심히 설거지를 해서 모은 돈으로 맛있는 것 신나게 사먹고 다니란다.
“요리는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먹어보는 것도 큰 공부입니다. 우선은 음식을 미치도록 좋아하고, 요리의 전 과정을 즐기는 게 중요하죠. 실력 있는 후배들이 많이 나와 글로벌 무대에서 한식이 일식 이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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