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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단종② 영월 장릉㉯--승하 550년만에야 장례식 치른 ‘비운의 왕’
(영월 장릉㉮에서 계속)

[헤럴드경제= 영월] 이때 박충원이 중종에게 아뢰어 자청해서 영월부사로 내려왔다. 사또는 그날밤 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데 단종이 나타났다. 예를 다해 맞아준 박충원에 대해 단종은 “이전 사또 셋은 나를 보자마자 혼절해 죽었는데 신(臣)은 놀라지 않고 맞아줘 고맙다” 하고는 “내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나를 좀 도와주면 신에게 큰 복을 내리리라” 하는 말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깼다.

사또가 이튿날 아침 관아의 대문을 활짝 열자 영월의 모든 백성들이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사또 마다 죽어나갔으니 이번에 또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모인 것이다. 사또는 사람들에게 깍듯이 엎드려 절을 하고 안으로 들게 하여 꿈 얘기를 했더니 원로 한 사람이 나서서 “이렇게 백성들을 존중해주는 사또는 처음 봤다. 이런 사또에게는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며 숨겨진 단종의 능으로 안내했다.

사또 3명이 잇달아 죽은 영월부사 자리로 자원해 왕명을 받고 단종릉을 찾아낸 박충원의 공덕비각. 왕릉 입구에 자리에 '가문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

사또가 단종의 무덤에 가서 온갖 가시덤불을 치우고 보니 봉분의 높이가 고작 두 자(尺ㆍ60cm)에 불과했다. 즉시 정성껏 봉분을 높여 쌓고 제물을 준비해 제향을 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상세히 적은 장계(狀啓)를 조정에 올렸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430년이 지난 1973년 밀양 박씨 문중에서 이 장계가 발견됐다. 문중에서는 영월군청과 문화재청에 박충원 부사와 단종임금과의 인연을 설명하면서 이곳에 작은 공덕비 하나 세워줄 것을 요청해 건립하게 됐다고 한다. 이 장릉이 확장되면서 박충원 비각이 단종 왕릉 오르는 계단 바로 오른쪽 입구에 자리하게 됐다. 조정 대신도 못들어갈 곳에 지방 관리가 왕의 무덤 앞에 자리잡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종이 꿈에서 말한 ‘큰 복’을 내린 것으로 주민들은 풀이하고 있다. 단종도 분명 박충원이 이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돼버린 것.

앞의 세 사또 처럼 ‘준비안된 만남’은 큰 화를 입었지만 ‘준비된 만남’은 이렇게 큰 복을 받게 된다는 교훈까지 안겨준 비각이었다.

능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계단길 입구 왼쪽의 단종역사관으로 갔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면서 관람했다. 이곳엔 단종 국장(國葬) 모습 등 다양한 단종의 향기를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관심끄는 것은 단종의 국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일반 백성도 죽으면 치르는 인생의 마지막 의식 장례식을 숨겨오느라 못치른 비운의 임금이었다. 

지난 2007년 영월군이 처음으로 주민들의 힘으로 국장을 치렀다. 이 때가 공교롭게도 사망한지 꼭 550년 되던 해였다. 그 전까지는 단순히 제향만 지내왔다. 김 선생님은 국장을 지내기 전까지 영월에서는 항상 뭔가 뒷매듭을 맺지못했다는 생각과 죄책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비운의 왕, 비운의 영월땅’ 등 소극적이고 암울한 정서에 빠져왔는데 국장을 지낸 후부터는 주민들이 모두 뭔가 큰 짐을 벗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 만큼 영월주민들이 단종에 대한 충절의 정서를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계단에 걸린 백마 탄 단종의 영정을 잘 보자. 슬픈 단종이지만 그림에서 만큼은 참 잘 생겼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렸다. 세종 때 한성부윤을 거친 추익한(秋益漢)이 산머루를 딴 바구니를 들고 길에서 만난 단종에게 고개 숙여 예를 갖추니 왕은 “나는 장차 태백산으로 가려고 한다” 고 했다. 추익한이 고개를 드니 임금님이 사라지고 없었는데 알고보니 그 시각 단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추익한도 따라 절명했다.

단종의 영정(왼쪽). 550년만에 국장을 지낸 모습, 그리고 도깨비놀이.

역사관을 빠져나오면 담장이 있는 집이 나온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다. 뜰의 향나무 고목이 눈길을 끈다. 향나무는 공기를 정화시키고 주변의 나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이어서 나오는게 엄흥도 정려각이다. 목숨을 걸고 단종의 옥체를 이곳으로 모신 충신 중의 충신이다. 영조2년(1726년) 어명으로 세워 충절을 기려왔다. 정려각을 지나 장판옥(藏版屋)과 배식단사가 길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마주하고 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4명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배식단은 추모하는 제단이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으로 들어서면 납작한 돌을 깔아놓은 두개의 길이 나란히 있다. 참도(參道)라고 한다. 왼쪽은 신만 다닐 수 있는 신도(神道), 오른쪽은 왕로(王路)로 일반인이 이용하는 길이다.

중간쯤 가면 우물이 나온다. 단종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우물 영천(靈泉)이다. 그런데 이 우물 속에 관광객들이 동전을 잔뜩 던져 넣었다. 유럽을 여행할 때 분수대 같은 곳에 동전 던져넣듯이 마구 던져놓았다. 비운의 어린 임금에게 신성한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우물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 몹시 안타까웠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신도와 왕로가 펼쳐져 있다. 일반인은 오른쪽 돌길, 왕로로 걷는다.
단종제향 때 사용하는 우물 영천. 네모와 원은 천지인의 개념을 뜻한다. 왕의 제향에 쓰는 우물인데 동전을 가득 던져넣었다.


우물에서 그 왕로를 따라 끝에 있는 멋진 건물이 정자각(丁字閣)이다. ‘丁’자 모양의 건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왕릉에 제향을 올리는 집이다. 

이 집 바로 뒤 높다란 구릉지 위에 단종의 능이 있다. 제향 때 뒷문을 열면 왕릉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셈이 된다. 그런데 위치 상 왕릉과 정자각이 일직선 상이 아니어서 결국은 왕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하는 구조가 됐다.

단종에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뒤쪽 구릉지 위쪽이 단종의 능이다.

정자각에서 옆에 있는 비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긴, 이제는 누구에게든 떳떳하게 단종의 능임을 공표하는 비석이다. 

빨간 글씨로 암각돼 있다. 영조 9년(1733년) 어명으로 세운 비석인데 석회암 뿐인 영월에서는 비석돌을 구할 수 없어 한양에서 만들어 남한강을 거슬러 가져왔다고 한다.

단종의 능임을 알리는 단종비각.

다시 홍살문을 나와 왼쪽 산비탈 데크를 따라 올라 능으로 향했다. 주변을 두루 살피고 마지막 관문 이제 진짜 단종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능선에 오르니 저 앞에 왕릉이 시야에 들어왔다. 능선 좌우로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소나무들이 도열하듯 줄지어 서있다. 왕릉은 생각보다 크진 않았지만 예쁘게 잘 단장돼 있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왔다.

능의 앞쪽 좌우엔 석인상(石人像)과 석마(石馬)가 각각 서있고 망주석 뒤엔 석양(石羊)이 한마리씩 바깥쪽을 향해 서있다. 뒤쪽 보이지않는 곳에 석호(石虎)도 있다.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석호의 존재 조차 모르고 발길을 돌린다. 기둥인 망주석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라고 했다.

또 특이한 것은 왕릉 주변 소나무들이 원을 그리듯 왕릉을 향해 고개 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청령포 관음송의 애절한 가르침을 받았을까. 이곳 소나무들도 단종애사를 아는 듯 했다. 

단종릉 주변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고개 숙이듯 살짝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다.

영월에서는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모든 것이 단종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린 왕의 애환이 서린 곳, 이젠 고이 잠들어 있을까.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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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庶人)’ 단종 언제 복위됐나 : 서인으로 생을 마감한 단종은 사후 224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에야 노산대군으로 추봉됐고 이후 숙종 24년(1698년) 11월16일 노산대군에서 묘호(廟號)가 단종으로 복위됐다. 무려 240년만에 왕으로 다시 인정받은 것이다. 능호도 노릉에서 장릉으로 추복됐다.

단종이 제 6대 임금으로 복권되면서 왕실과 조정에서는 적잖은 ‘일’이 생겼다. 세조부터 당시 숙종까지 왕들이 모두 한 칸씩 뒤로 밀려나는데 따른 일들이 생겼다. 특히 왕릉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가 큰 문제로 대두됐다고 한다. 현재 장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조금 작은 편인데, 당시 조정에서는 태종 이방원에 왕위를 선양한 2대 임금 정종의 예를 따라 추복했다고 한다. 단종도 형식상 세조에게 왕위를 선양했었다.

1970년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됐다.

멀리서 본 정자각과 단종비각, 위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 왕릉의 당주석, 왕릉으로 가는 능선 길.(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영월군민들은 1967년 4월 단종제향일에 문화제를 함께 열어 단종과 충신들의 넋을 기리며 축제로 승화시켜 ‘단종문화제’로 탄생시켰다. 군(郡)이 주관, 전국에서 유일하게 왕릉에 제향을 올리는 50년 가까운 역사와 전통의 축제가 됐다.

장릉은 일반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새를 위한 정자, 참도가 일직선이 아니고 90도로 꺾어진 점, 세호가 없는 망주석, 사또의 공적비, 정려각 등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유일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 능이다.

장릉은 다 같아 보이는 한 왕의 무덤이지만 이것저것 알고보면 훨씬 더 재밌는 왕릉기행의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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