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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협소설에 빠진 소년, 장풍을 날리다

  • 주폭 · 조폭에 ‘無形劍’ 날린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暴暴’한 사회에서 악당없는 강호 꿈꾸는 무림 고수 이야기
  • 기사입력 2012-11-1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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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부터 무협소설에 심취, 善이 승리하는 선악대결 스토리에 열광…나의 꿈 ‘악당을 무찌르고 싶다’는 현재 진행형

술·담배·무협지 끊고 1년간 무섭게 공부…뒤늦게 행시 합격후 우연한 기회에 경찰 입문 “이젠 뼛속까지 경찰인”

술에 관대한 대한민국 사회에 ‘주폭’이라는 개념 첫 도입 특허까지 내…25개 자치區 대규모 ‘주폭소탕’ 작전통해 공원·놀이터 다시 시민들 품에

욱하는 성격탓 스스로 ‘도끼’에 비유…도끼질 않고 문제점 해결해야 진정한 고수인데 그 단계 오르기 위해 지금도 내공 연마중


악당(惡黨)을 무찌르고 싶었던 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무협(武俠)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올해 나이 55세인 그는 아직도 무협소설을 사랑한다. 어찌보면 무협소설의 스토리 구조는 뻔하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악당이 있고, 이 악당을 무찌르기 위해 주인공은 부단한 연마를 한다. 악당에 맞써 싸우지만 패배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은 스스로의 한계를 참아내고 결국 고수가 돼 악당을 무찌른다. 고등학생 때 그는 이미 1만권 이상의 무협소설을 독파했다. 이후에도 손에서 무협소설을 놓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정확히 셀 수 없지만, 수만권은 읽었다고 회고한다. 무협에 빠져 있는 사람, 바로 현재 서울시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김용판(金用判)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얘기다. “악당을 무찌르고 싶다”는 다소 유치해보일 수 있는 어렸을 적 꿈은 그의 성장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그는 서울의 치안을 맡아 서울시민의 안전지킴이로 활약하고 있다. “I Have A Dream(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이라고 말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처럼 김 청장에게도 꿈이 있다. “악당을 무찌르고 싶다.” 그의 꿈은 과거에도 그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에 있던 ‘주폭(주취폭력)’을 소탕해 공원ㆍ놀이터를 시민의 품으로 되돌려줬다. 이제 그는 “조직폭력배를 소탕하겠다”고 하고, “시민의 소중한 재산을 갉아먹는 사기범이 더이상 발을 디딜 수 없게 하겠다”고 큰소리친다.
 

눈매가 다소 무서워 보이는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 그는 이런 이유로 누구를 만날 때든 치아를 환히 보이며 웃는다. 크게 “하하하하” 소리까지 낸다. 김 청장은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주폭’이라는 단어로 명명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 후 지속적으로 주폭 단속을 해 좀더 상쾌한 서울거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무협소설이 꿈을 키우다

지금은 대구시에 편입된 경북 달성군의 한 농촌에서 김 청장은 4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뭐든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놀이면 놀이, 공부면 공부 무엇하나 뒷처짐없는 영민한 소년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탓에 그는 농사일을 도울 때가 많았다. 방과후 고된 농사일로 저녁이면 녹초가 됐지만 농사가 그의 학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학업성적은 늘 상위권에 있었다.

형들과 나이 차가 많이 났던 그는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형들이 보던 무협소설을 접했고, 곧 무협세계에 빠져든다. 칼싸움이 많이 나오는 만화를 봤지만 무협소설에 맛을 들인 뒤 만화는 시시해졌다.

무협소설의 스토리는 선악(善惡) 대결구도이고 종국에는 선이 승리하는 식이다. 김 청장은 그런 스토리 구조에 열광했다. 그러면서 그의 잠재의식 속엔 자연히 선에 대한 동경, 선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게 됐다.

골목대장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그다. 그 맘때 아이들처럼 그 역시 사소한 다툼에 주먹을 쓰는 일이 많았지만 무협지는 그에게 또래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할 조숙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의(義)가 아닌 곳에 절대 주먹을 쓰지 말라’는 교훈이다.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동무들의 기억 속에 그는 항상 ‘의협심이 강한 골목대장’ ‘아무때나 주먹을 쓰지 않는 친구’로 남아있다.


‘슬로우스타터(Slow Starter)’

“난 공부를 잘해”라는 자만심이었을까. 그는 고교 졸업 후 삼수를 해 대학에 갔다. 세 번째 대학에 도전할 때는 서울까지 와 공부했지만, 그놈의 무협소설을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김 청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가슴이 아프다”고 표현했다. 만화방에서 무협소설을 보며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게 후회스럽다는 거였다.

대학에 합격한 뒤 공부를 했을까. 김 청장은 이렇게 되묻는다.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입영통지서를 받고 군에 갔다. 최전방인 15사단 38대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군제대 후 그는 뒤늦게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뒤 세 가지를 끊었다. 술과 담배, 그리고 운명처럼 놓기 힘들었던 다른 하나 ‘무협지’였다.

1년간 무섭도록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남보다 뒤늦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어디선가 제 점을 보고 오셨는데, 관운(官運)이 있더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장ㆍ군수 등이 되는 막연한 꿈을 꿨고, 행시를 보게 됐죠. 그런데 저는 얌전히 일하는 스타일이 안돼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고, 의기가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결국 특채로 경찰이 됐습니다.”

‘상상력’은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것

김 청장은 독특하다. 그의 방 한 편에는 입식테이블이 놓여있다. 선 자세로 보고를 받고 회의를 진행하는 탁자다. 왜 이런 테이블을 가져다 놓았느냐는 말에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짧은 시간, 회의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첫번째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눈높이를 맞춰 허심탄회한 자리를 만들기 위함이 두 번째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 청장은 10여년 전 대구청장으로 일할 때 오토바이 폭주족을 단속해 유명세를 탔다. 이후 충북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술(酒)에 관대한 대한민국 사회에 ‘주폭’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주폭이라는 새로운 단어에 대해 특허까지 냈을 정도다. 살인에 강도, 강간 등 흉악범죄라도 취중에 범죄를 저지르면 사회에서는 심신이 약할 때 한 행동이라 해서 관대한 처벌이 이뤄지던 때였다.

그러나 김 청장은 이를 ‘주폭’이라 규정했다.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에 대해 관용은 없다고 선을 그은 것. 김 청장이 지역사회에 도입했던 주폭이라는 개념은 이제 초등학생도 알 정도다. 이후 충북지방에서는 술 먹고 상습적으로 술주정을 하는 이들을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가 됐다.

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김 청장의 주폭 단속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확장됐다. 현재 김 청장의 노력으로 서울에서 술을 마시고 폭행을 일삼았던 주취폭력자는 거의 사라진 상태다. 김 청장의 주폭은 그동안 없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주폭이 사라질 무렵 김 청장은 조직폭력배를 잡겠다고 했고, 최근에는 국민이 평생을 모은 돈을 은근슬쩍 감언이설로 꼬드겨 훔쳐가는 사기범을 검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사기범의 해악은 절도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기범에게 당한 피해자의 경우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의 경제활동에 큰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은퇴 후 노후생활을 위해 평생 모은 재산을 빼앗아 도망치는 사기범은 끝까지 추적해 잡아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협지는 상상력의 원동력, 배움의 원천

김 청장은 이 같은 창의적인 업무수행의 비결을 묻자, 조금은 생뚱맞게 “무협지 덕분”이라고 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통해 배움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가급적 말을 아끼고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려하는 것 역시 무협지에서 배웠다”고 했다. 비록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라 해도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실천하는 무협소설 영웅의 ‘신의’에 감명받았다고 김 청장은 설명했다.

김 청장은 무협지에 담긴 전략과 지략을 현실세계에 응용하려는 노력도 한다. 한 수 위 고수이건, 한 수아래 하수이건 간에 배울 게 있다면 누구에게든 배움을 갖고자 한 것이 오늘의 김용판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런 이유로 김 청장은 ‘한 수 배우러 가는 단체’(한배단)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자신이 직접 이름을 붙였다. 한 수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달려간다는 그는 “모든 인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를 낮추고 타인의 훌륭함을 인정해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경찰’이란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한 그는 경찰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지난 22년간 그 자리를 굳게 지켰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 그는 뼈속까지 경찰이라고 자신할 정도다.

김 청장은 “경찰은 너무나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이를 경찰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할 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찰의 책무를 강조하면서 “프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감(感)도 중요하지만 일처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인 접근”이라고 덧붙였다.

일례로 김 청장은 주폭 척결의 성공 비결은 과학적 접근에 있었다고 소개했다. 주폭자의 상습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확보하고, 범죄심리를 활용해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처벌받는다는 것을 알려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닌 범죄

‘우리가 모르는 숨은 범죄가 있다면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김 청장은 금새 ‘협박죄’를 꼽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신고하지 않으면 절대 드러나지 않는 범죄가 협박이라고 했다.

그는 “협박은 수면 아래에서 시민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범죄”라고 규정했다. 이어 “협박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같은 사실을 스스럼없이 편안히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협박을 받고 있는 국민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피해상황을 알릴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김 청장은 경찰과 주민이 협력을 통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눈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주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범죄를 저지르기가 어렵고, 이는 결국 경찰력의 증대와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욱하는 성격, 나는 ‘도끼’였다

김 청장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도끼’였다고 말한다. 간혹 욱하는 성격탓에 남에게 직설적인 말을 해 상처를 입혔다며 이를 도끼질에 비유했다. 그가 스스로를 도끼라고 인정한 것은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니다. 어느날 세계속담대사전에서 그는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잊지 못한다’는 아프리카 스와힐리족의 속담을 보게 됐다. 상처를 입은 나무는 도끼의 상처를 잊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그날 이후 도끼질을 가려 하려 한다고 했다. 남에게 상처가 될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도록 참고 자제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내 도끼질에 상처를 입고, 영혼이 다친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도끼질을 하지 않으면서 문제점을 해결해야 진정한 고수인데, 나는 아직 고수가 되려 노력할 뿐 고수 단계에는 못 이른 사람 같다”고 겸손해했다. 

김 청장은 누군가를 똑바로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기(氣)에 압도돼 오싹하는 카리스마의 소유자다. 첫 인상이 무섭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외모 역시 누군가에게 도끼가 될까 싶어 기회가 있으면 가급적 웃으려 한다고 했다.


김용판은 누구인가

김 청장은 말을 아끼려 하지만 그래도 말이 많다고 했다. 말 많이 하는 DNA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술이 들어가면 더 말이 많아진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그는 변했다. 남의 얘기를 가급적 많이 들으려 한다.

그는 “직장에서 회식을 하는 것은 소통을 위한 것인데, 상사만 얘기하고 부하 직원이 말을 않고 있다면 소통이 되겠느냐”고 했다.

그는 어릴적 자신의 이름 ‘용판’을 창피하게 여겼다. 발음이 촌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간혹 친구들이 이름 대신 ‘용팔이’라고 부를 때 달려가 혼쭐을 내주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용판이란 그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했다. 특히 판이란 순수 우리말 풀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뿌듯함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판이라는 것은 우리 고유의 말로 ‘바로 이 순간, 이 자리’라는 뜻을 갖고 있다”며 “시간과 공간이 어울리는 말로 이 순간, 이 자리를 신명나고 흥이 나게 해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청장의 최근 별명은 ‘판선생’이다. 즐거운, 흥겨운 판을 깔아준다는 의미로 지인이 붙여줬다고 한다. 김 청장이 마련한 판에서 시민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음껏 신명나게 춤추는 그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허연회 기자/okidok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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