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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인의 꿈’ 장수와 춤을…
국내 장수학 연구의 최고권위자…‘이길여 암·당뇨연구원’ 박상철 원장의 꿈과 삶
의대 졸업 후 기초의학으로 2~3년 실력 쌓고 의사 되려했는데 그 길로 생화학에서 장수학까지 30여년 연구인생을 살았어

노화연구하며 생쥐에 독성을 주입했더니 늙은 쥐가 젊은 쥐보다 잘 견디더라고, 거기서 딱 느낌이 왔지

노화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구나…늙은 세포일수록 생존하려는 저항이 크구나… ‘안티에이징’이 아닌 ‘웰에이징’ 개념 떠올랐어

탑골공원 무기력한 노인들 보고 충격 받아 2년간 한량무 배워 ‘장수춤’도 만들어…장수하려면 마지막까지 움직이고, 봉사하고, 배워야지


봄볕이 따사롭던 날.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인천 송도 국제신도시 마천루(摩天樓) 한켠, 가천의대 단지 ‘이길여 암ㆍ당뇨연구원’에서 국내 장수학의 최고권위자 박상철(63) 원장을 만났다. 건강과 장수가 이 시대 최고의 가치로 떠오른 지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몸값 비싸고 바쁜 사람이다.

“멋스러운 스토리가 없는 내게 인터뷰는 무슨….” 손님을 맞는 박 원장의 함박웃음에서 34년 연구자로 외길 인생을 살아온 학자의 차가움보다 땀냄새 나는 인간미가 느껴졌다. 

박 원장은 국내 10만여명의 노인이 즐기고 있는 ‘장수춤’의 기획자이자, 국내외 장수 연구를 주도해온 서울대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으로 그동안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하지만 지난해 말 정년을 3년 남겨놓은 시점에서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졌다. 

그리고 이길여 암ㆍ당뇨연구원장으로 부임하며 다시 연구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서울대에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처지였고, 그래서 더 이상 장기프로젝트를 위한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없었다. 평생 연구자로 살아온 그에게 연구 중단이란 목숨을 잃는 것과도 같은 의미였다. 

그가 자리를 옮겨가며 현재 진행 중인 연구과제는 늙은 세포를 젊게 하는 꿈의 프로젝트다. 그래서일까 연구원 앞, 색이 곱디고운 진달래꽃 화단 앞에서 인터뷰용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은 천진함과 진지함이 가득했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설렘 가득한 소년의 눈빛이었다.

“정년퇴임 뒤에는 강연만 다니면서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지만 내겐 아직도 해야 할 연구과제가 있다. 저만치만 가면 길이 보이는데 여기서 중단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정년 1년을 남기고는 연구자의 길을 위해 다시 떠나려고 했다. 그 시간이 조금 당겨진 것뿐이다. (후배들에게) 텃세나 부리는 영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30여년 학자 인생 만든 기초의학에 대한 호기심

박 원장과 인터뷰는 우여곡절 끝에 성사됐다. 보건복지부로부터 한국을 방문한 사우디 왕립병원사절단에 한국바이오산업 현황을 브리핑해 달라는 긴급요청을 받고 인터뷰 시간을 오전에서 오후로 옮긴 뒤였다. 외국 사절단이 올 때마다 복지부는 박 원장을 부른다. 그만큼 장수학과 생화학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다. 박 원장이 이처럼 국내 장수학 연구의 최고봉이 되기까지 30여년 세월엔 드라마 같은 사연도 많았다.

1970년대 중반. 박 원장은 기초의학으로 실력부터 쌓은 뒤 의사로 나가겠다는 생각에서 기초의학 분야 중 하나인 생화학(생물체 내에서 물질의 화학반응 등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 공부를 위해 대학에 남기로 했다.

하지만 2~3년만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지금껏 평생 연구자의 길로 이어졌다.

당시는 아무도 기초의학에 관심을 갖지 않던 때였다. 서울대 의대 졸업생이 100명이면 그 중에서 90명이 유학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국내에서는 월급 등 처우가 좋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기초의학을 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렸다. 대학엔 기초학문을 하는 선배들도 없었다. 나보다 5년 10년 앞선 선배들이 몇 있었을 뿐이다. 인물이 없다 보니 각종 기초학문의 토양도 그만큼 척박했다.”

별종처럼 우직하게 기초의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그렇게 한국 기초의학의 문을 열어주는 첫 세대가 되고 말았다.

한국독성학회, 암학회, 노화학회 등 각종 학회가 그때 박 원장을 포함해 몇 안 되는 소신파 학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탄생했다.

기초의학에 대한 토양이 척박한 현실이다 보니 새로 탄생하는 학회도 숫자가 많았다.

“여러 스승을 모시고 혼자 일을 도맡아 하면서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그때는 내 인생 최고의 질풍노도의 시절이었다.”

그는 일복을 타고 났지만 늘 즐겁게 일을 했다. 이처럼 여러 교수의 공동 조교 역할을 도맡고서 4년을 대학에서 땀을 흘렸다. 


“한번은 내 강의에 95세 된 노인이 왔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박 교수, 내가 수업을 못 받을 이유가 있나?’였다. 나는 그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 뒤부터 국제적인 학자들이 모인 곳에 가면 그때 95세 노인이 한 말을 자랑스럽게 들려준다.” 박 원장도 이 노인처럼 필생의 마지막 연구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한국 최초의 각종 보고서를 쏟아낸 군복무 시절

일벌레 박 원장은 군생활도 누구보다 바쁘게 지냈다. 시간만 때우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보낼 수 있던 군 장교 신분이었지만 그의 궁금증과 연구벽은 군대에서도 그의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낯설던 해양오염 보고서, 해군함정의 급수수질 보고서 등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각종 연구보고서를 1년 동안 11개나 쏟아냈다.

1977년 소령을 달고 해군에 입대한 박 원장은 진해 해군기지 해군병리시험연구소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이름은 연구소였지만 몇 해 뒤 탄생할 대한민국 최초의 잠수함 부대를 위해 잠수함요원을 양성하는 트레이닝센터였다.

한국 최초의 해양오염 보고서는 우연히도 그의 추억과 연결된 해변에서 탄생했다.

그는 어느 날 마산의 가포리 해수욕장을 찾았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한번 와봤던 추억의 장소였다.

하지만 아름답던 해변 풍경 대신 그를 맞은 것은 적조 현상에 붉게 오염된 바다였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산업화 물결에 마산ㆍ창원 공단이 규모가 커지면서 바다로 폐수를 대량으로 방류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때 박 원장이 만든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오염 보고서였다. 학계는 물론 정부에도 해양오염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급수수질검사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박 원장은 어느날 우연하게 점심을 먹으러 간 군함에서 함장과 사병들의 푸념을 들었다. 배에서 마시는 물맛이 육지와 크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궁금증이 생긴 나는 함장을 대동하고 직접 급수탱크로 가서 뚜껑을 열어봤다. 급수탱크 안으로 넣은 뒤 탱크벽을 훑고서 빼자 시뻘건 녹물찌꺼기가 한움큼 묻어났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수질 유지를 위해서 정기적으로 물통을 닦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건이 나중에 해군의 3급 비밀이 됐다.”

그 뒤부터 진해의 모든 해군 함정이 박 원장에게 급수수질 검사를 받아야 했다. 계급은 소령이지만 해군 제독 못지않은 지위였다. 또한 군장병의 성병검사, 장병이 어린 시절부터 잘못 알고 있던 혈액형을 바로잡아주는 혈액형 자각인지도에 대한 연구 등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일벌레였던 그는 군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행을 결심한다.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연구박사라는 제도가 시발점이 됐다. 일부 교수는 박사학위를 따려는 제자에게 돈을 받았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따려는 제자는 교수의 연구를 도와줘야 하는 등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이 문제를 두고 스승들과 맞서다 유학길을 떠난다.

1982년 미국땅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 국립보건원(NIHㆍ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에서 당시 미국 최고의 노화학자였던 얼 스타트먼 교수의 제자로 공부를 하고 돌아온다. 대학에 다시 돌아온 그는 연구담당 부학장보(연구책임자), 연구처장 등 각종 주요 보직을 하며 40대를 바쁘게 보냈다. “내가 제일 후회한 것이 40대 한창 나이에 연구가 아닌 학교 행정에 빠졌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다.”



안티에이징 대신 웰에이징 개념 만든 창시자

박 원장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안티에이징(Anti-aging)’ 이론을 평가할 때 유독 야박하고 독한 표현을 썼다.

“안티에이징 그건 화장술에 불과하다.”

기존의 안티에이징은 노화를 억제하고 방지하는 ‘항노화(抗老化)’, 즉 노화방지 개념이 핵심이다.

하지만 노화방지라는 말 자체는 ‘노화는 나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박 원장은 늙으면 나쁜 사람, 뒤로 물러나 은퇴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안티에이징 개념을 자신의 연구성과를 통해 깨뜨렸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암 연구를 하던 중 생쥐 실험을 통해 노화 세포가 젊은 세포보다 더 강한 저항능력을 보인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그를 노화연구가에서 장수학자로 탈바꿈시킨 계기가 됐다.

“독성을 생쥐에게 주입하는 생쥐실험에서 늙은 쥐와 젊은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니 젊은 쥐가 더 잘 죽더라. 거기에서 느낌이 왔다. 노화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구나, 살자는 것이구나. 늙은 세포일수록 생존하려는 저항이 크구나. 내가 얻은 이 결론은 노화는 생존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장수는 뭐냐. 생존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박 교수는 ‘젊은 세포와 노화 세포 실험’이라는 이름의 이 연구 결과를 2002년 세계적인 권위지 ‘네이처’에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노화에 대한 기존의 개념과 세간의 인식을 수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안티에이징 대신 제대로 늙어가야 한다는 개념의 ‘웰에이징(well-aging)’을 만들었다.

안티에이징과 차이는 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웰에이징은 노화를 적대시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바람 나는 삶…춤바람 난 노교수

박 원장이 말하는 건강 장수비결은 약이나 식품이 아니다. 바로 제대로 움직이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장수춤을 만들어 널리 알렸고, 건강식단을 중심으로 요리교실을 열었다.

그가 개발한 장수춤체조는 쉽게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간호학과, 재활의학과 교수들에게 장수춤 개발을 주문했지만, 막상 완성된 춤을 보니 지루하고 노인들이 따라 하기에는 동작이 너무도 어려웠다.

고심 끝에 그가 직접 춤을 배우기로 했다. 국립극장 프리마돈나도 찾아갔다. 국립극장에서 무용가들의 춤사위를 보고 매료된 그는 1996년부터 2년간 한량무라는 춤을 배웠다. 실제로 무대에서 세 번이나 공연을 했다.

“공연 뒤 미국을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열흘간 춤 연습을 안 했을 뿐인데 춤 동작 순서가 생각나지 않더라. 나도 그런데 노인들에게 이렇게 어려워서는 곤란하다고 했더니 춤 선생이 예술을 망치려고 하느냐며 노발대발하더라.”

그는 그 뒤에도 무용학회 세미나를 따라다니는 등 춤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을 줄 몰랐다.

그리고 갖은 노력 끝에 한글의 자음 모양을 본따 춤 동작을 만들었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하기에는 한글 자음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이걸 춤이라고 내놓으면 무용계로부터 욕을 먹게 생겼으니 이름을 춤체조라고 붙였다. 사실은 춤도 아니고 체조도 아니다.”

완성된 춤을 전국의 몇몇 복지관을 통해 알리는 노력도 잊지 않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9년부터 2년 동안 9000여명의 노인이 이 춤을 배웠다.

박 원장은 2001년 가을. 서울대 올림픽체육관에서 춤체조로 공연을 가졌다.

공연에는 2000여명의 노인이 몰려들었다. 음악이 흐르자 모두가 의자를 박차고 나와 음악에 맞춰 이 춤체조를 덩실덩실 췄다.

“참석했던 노인들이 아우성이었다. 춤의 다음 단계를 가르쳐 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나는 다음 단계의 안무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운동부족으로 관절염 앓는 노인들에 충격

박 원장이 장수춤을 개발한 데는 노인들을 움직이게 하여 건강을 되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바탕이 됐다.

1990년대 중반. 그는 어느날 점심시간에 우연하게 들어간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수백명의 노인이 벤치와 공원 바닥에 쭈그린 자세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운동을 하지 않아 관절염이 생긴 노인들이 온전하게 서 있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점심때가 되니 무료급식차 앞에서 수십 미터의 줄을 서가며 급식을 받아갔다. 급식을 받는 이 중에서 할머니는 서너 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할아버지들이었다.

박 원장은 할머니들은 대부분 집안일을 할 줄 알다 보니 식사를 차려 먹을 수 있지만, 할아버지들은 부엌에 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 탓에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 탑골공원에 나와 있다가 무료급식을 받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노화 연구를 하는 소장인데 내 힘으로 저 노인들이 건강하도록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춤체조의 탄생 배경이었다. 박 교수의 춤체조는 현재 전국적으로 10만명이 넘는 노인이 즐기는 건강 스포츠로 인기가 높다.

박 원장의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서울대에서 ‘인생대학’을 개설한 것을 필두로 노인 건강교실인 ‘미니매드스쿨’과 ‘장수과학최고지도자과정’에서 노인들에게 의학 상식을 가르쳤다.



마지막까지 움직이고 봉사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라

박 원장이 말하는 장수 비결은 단순하다. 마지막까지 움직이고. 남에게 봉사하며, 배우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텃밭에서 일을 하든, 광주리 짜는 일을 하든 마지막까지 몸을 움직이라고 충고를 한다. 또 진정한 기쁨은 남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즐기면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마지막까지 배우려고 노력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내 강의에 95세 된 노인이 왔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박 교수, 내가 수업을 못 받을 이유가 있나?’였다. 나는 그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 뒤부터 국제적인 학자들이 모인 곳에 가면 그때 95세 노인이 한 말을 자랑스럽게 들려준다. 늙어도 마지막까지 뭔가 하려고 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바로 장수의 힘이라고 말이다. 물론 은퇴를 앞둔 나도 연구라는 일을 통해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심형준 기자/cerju@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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