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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짱이 안철수의 오늘, 하루
의사·CEO·교수…그의 사전에 도전이란 없다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영입하고 싶은 CEO·가장 건전한 경영자·차세대 경제리더·떠오르는 스타교수…라지만,

나는 그저 비 오는 날 집 앞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마트에서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우유 하나 덤으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아등바등 한적 없어요, 다만 주어진 24시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

원대한 목표가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하더라고요.





▶바닥에서 정립한 마이웨이 철학 ‘절대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안 원장은 평생 자신을 바로 세워줄 버팀목 같은 철학을 만들었다. 바로 ‘절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할수록 저 자신만 힘들어지더라고요. 남들이 다 위만 보고 갈 때 나라도 가끔 아래를 내려다보자고 생각했죠.”

안 원장은 이를 산을 오르는 것에 비교했다. “정상만 바라보면 구름이 가리기도 해서 불안해지는데, 뒤돌아보면 ‘없는 가운데 이만큼 왔구나’ 하고 안심이 되잖아요. 결국 원대한 목표가 사람을 지치게 하더라고요.”

이런 생각에 안 원장은 목표를 크게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 허덕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일주일, 한 달이란 시간을 값지게 쓰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남부터미널 작은 사무실 안에 갇혀 장부 계산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는 자신을 애타게 여기던 그 자신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안 원장은 걷기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너무 안 풀리면 정처 없이 걸어 다녔어요. 서초동 소나무사거리에서 출발해 테헤란로 지나 삼성역까지 걸으면 2시간30분이 걸리죠. 모르고 지갑 두고 나간 날은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해서 왕복 5시간 가까이 걸었던 기억이 있네요.”

흔히 ‘걷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신수양’이라는 말이 있다. 안 원장은 강남 도심 일대를 5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마이웨이 철학을 정립했다.

안 원장의 마이웨이는 훗날 안철수연구소가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백신을 개발하면 신제품 값을 받는 대신, 새로운 버전에 대해 유지ㆍ보수비용을 받기로 했다. 백신 특성상 신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처음 도입된 계약 방식을 거부했다. 연구소 영업담당 임원도 실적이 안 나오자 안 원장에게 포기하자고 청했다. 

“당시 유혹도 매우 컸어요. 수익이 안 나왔으니.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기로 했죠. 마침내 법률까지 바뀔 정도로 지금은 그 계약 방식이 상식이 됐죠. 눈앞의 돈만 좇다 단기 계약에 의존했으면 지금의 500억원 매출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안 원장의 이런 철학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안 원장의 딸은 미국에서 수학과 화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길이다. 딸에게 진로에 대해 아버지로서 훈수를 둔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한다.

“본인 인생인데,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죠. 내가 하도 이래라저래라 말이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 딸이 나한테 물어볼 정도입니다.”

또 마이웨이 철학은 23년간 매스컴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잘나가는 사람들 보면 외부 평가가 진짜 자기 실력인 줄 아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자기 본 실력 알고 나면 많이 괴로워하죠. 외부 평가는 롤러코스터 같아요. 몇 번 올라가는가 싶더니 바로 고꾸라지기 일쑤죠. 그래서 저는 외부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평가가 아무리 나빠도 내 본 실력만 믿고 살아왔습니다.”



▶워커홀릭? 나는 휴먼홀릭!

안 원장은 아직 여름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들 다 1년 중 한 번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국내외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올해 역시 서울대로 둥지를 새로 틀었기 때문에 여름휴가 떠날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평생 일과 공부에 묻혀 살았다.

“연구소 차리고 나서는 정신 없이 일만 했어요. 교수가 되고 나서는 방학이 있었지만 초보 교수가 어디 놀러 갈 수 있나요? 학회 등 공무상으로 해외에 가본 적은 있지만 LA, 런던, 파리 등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는 아직 못 가봤네요.”

이쯤 되면 워커홀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순간조차도 현실을 떠나 머리를 식히기보다는 철저히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안 원장이 진정으로 열중했던 것은 결국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의대생 시절 우연히 들어간 가톨릭학생회를 통해 진료 봉사를 하면서 책에서만 읽었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계를 느꼈던 시절이었지만, 안 원장은 사람들을 만나며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더 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안 원장이 연구소를 차리고 회사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이어졌다. “초기엔 힘들었지만 10년 정도 지나니까 안철수연구소는 벤처기업 중에서도 매우 큰 기업이 됐죠. 하지만 안철수연구소는 잘 먹고 잘사는데, 주변 벤처기업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청년 일자리는 점점 줄고, 도전의식도 약해졌죠.”

“사람들이 ‘그런 문제의식을 왜 갖고 사느냐’고 하지만, 혼자서만 잘살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 집 아이가 행복하려면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결국 안 원장은 CEO 혼자 힘만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느꼈고, 보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길을 택했다. 2008년 미국 와튼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KAIST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최근 흘러나오는 정치권 영입설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교수가 매우 중요한 위치라며 에둘러 부인했다. “정치라는 게 혼자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만나는 거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수는 작은 부분이지만 혼자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같은 생각의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안 원장이 신념과 가치관이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 김미경 교수(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다.

“가톨릭학생회 봉사활동을 가서 만났는데,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랑 같았어요. 또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무조건 시키자’는 교육관도 같았어요. 특히 돈 더 많이 벌고, 더 안정적인 것을 따지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직업관도 똑같았죠.” 


▶약속된 미래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나의 최대 자산은 ‘사람’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안 원장의 라이프스타일은 ‘내일보다는 오늘을 위해 살자’였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그는 일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개미가 아니라 하루를 최대한 보람 있게 보내는 베짱이에 가까웠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지난 삶의 행보에 그대로 묻어 있다. 엘리트 코스인 의사를 훌쩍 그만두고 야심 차게 회사를 차렸지만, 자기 발로 CEO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의대를 들어갈 때, 창업할 때 모두 안 원장 스스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학 후 카이스트 교수로 임명됐을 때 임용장에는 2008~202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 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다시 3년 만에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서울대로 옮겨왔다. 서울대 역시 그에게 2027년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안 원장은 2027년까지 서울대에서 교수를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장기 계획이란 걸 세워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 평생 한 번도 안정, 보장이란 말이 나를 붙잡은 적은 없어요. 선택의 순간에서 모든 걸 고려했지만, 이 둘은 항상 빠져 있었죠. 처음엔 의사만 할 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결국 안 원장은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며, 이를 실천하는 시간까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시간마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투자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렸던 셈이다.

다만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명확한 한 가지 기준은 있었다. “결정은 혼자 오래 고민해서 내리는 편입니다. 대신 기준은 늘 같았어요. 나에게 더 의미 있고, 내가 계속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에는 늘 사람이 제일 위에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 역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 달라니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왔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물론 전기생리학 전공 시 존경했던 교수들은 모두 노벨의학상을 받았어요. 90년 중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들에게 열광했고, 회사를 차리고 나선 앤드루 그로브(인텔 창업자)처럼 성공한 엔지니어 출신 CEO가 되고 싶었죠. 와튼스쿨 다닐 때는 레오나드 M 로디시 교수로부터 배운 교수법 덕분에 카이스트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 잡았어요.”

안 원장은 직업이 바뀔 때마다 롤모델도 번번이 바뀐다고 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알찬 지식을 배웠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요즘처럼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과 만나는 게 중요할 때가 없어요. 20~30대는 혼자 실력으로도 일하지만, 40대부터는 인간관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죠. 나이 들어서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하는데 다 옛말 같습니다.”

그는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친화력보다 더 큰 무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친화력은 처음에 쉽게 하는 데에만 도움이 되지,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가치관 등 동질감을 형성하는 거 같아요. 안 연구소가 16년 됐는데 지금도 장기 근속자는 50명이 넘어요. 친구로 따지면 평생 친구인 거죠.”

정태일 기자/ killpass@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 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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