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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면, 신사참배 독려…안익태, 日王 즉위축하곡”

  • 기사입력 2010-03-2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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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8일 공개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역사책 속에서 항일 의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인사도 대거 포함돼 충격을 주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와 홍난파 음악가 등이 올랐고,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던 인물들도 들어있어 파장이 적지않을 전망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주요 인사와 이 연구소가 주장한 ‘친일’ 행적.

▶박정희=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1939년 재차 응모하며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와 함께 제출했다”고 기술했다.또 박 전 대통령이 1942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으며, 1944년에는 만주국군 소속 보병 제8단으로 배속돼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장면 전 국무총리=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 연맹은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미사 후에는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갖도록했다.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1942년 ‘춘추’ 11월호에 “정신에 있어서는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토대로 황국신민 양성에 힘을 다한다”는 글을 기고하고 1942년 12월6 일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를 역설했다.

▶김성수 전 부통령= 1943년 8월5일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내용의 징병 격려문을 기고했으며, 같은해 11월6일에는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실어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1943년 12월10일에는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을 밝히며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하고, 같은달 17일 보성전문학교의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는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됐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

▶장지연 언론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여 동안 총독부 기관지인 ‘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편의 글을 실었다. 특히 1916년 12월10일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환영하는 한시를 매일신보에 싣기도 했다.(장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항일’ 기사로 독립유공자로 분류된 인물임)

이종욱 전 의원= 일제시절 총본산 암사에 창씨개명 상담소를 설치하고 1941년에는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라”는 통첩을 전국 사찰에 보낸 사료가 발견됐다.

▶안익태 음악가=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에텐라쿠’를 발표했는데, 이는 본래 일본 천왕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사용되던 일본의 관현악 ‘에텐라쿠’를 그대로 차용한 작품으로, 안익태는 이를 1939년 로마방송오케스트라 연주회, 1940년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 등에서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또 1942년에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의미로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기념음악회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홍난파 음악가= 1937년 6월을 전후해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작곡하고 11월 4일에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인 있는 필자는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금후 일본제국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는 글을 썼다.

▶최승희 현대무용가= 1942년 2월 ‘최승희 무용공연’을 개최하면서 “우리 무적 황군은 싱가포르를 공략 성공하고 있는 이때 저는 무용으로 그 기쁨을 축하하게 된 것으로 참으로 광영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무용공연 수익 중 7만5천원이 넘는 금액을 국방헌금ㆍ황군 위문금 등으로 헌납했다. 해방 후 중국에서 인천으로 건너왔으나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월북했다고 기술했다.

김동인 문학가=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41년 7 월24일부터 ‘매일신보’에 의자왕이 항복하자 일본이 구원하러 온다는 내용의 ‘백마강’을 연재했다.

▶서정주 문학가= ‘매일신보’에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고 썼으며, 1943년 수필 ‘스무살 된 벗에게’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나갈 것”이라고 썼다.

김동한 독립운동가= 1925년부터 친일인사로 전향해 1934년에는 항일세력 파괴와 민간인 통제를 위한 특수공작대를 설립, 항일부대원을 살해ㆍ체포하는 일에 나섰다. 1937년 항일군과 교전 중 사망했고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 그의 위패를 안치했다.

김상수 기자/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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