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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7] 중세의 끝자락에서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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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앤드루스를 배경으로 한 '위대한 매치'라는 골프 그림.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세인트 앤드루스에 전해져 오는 골프에 대한 전설을 들려줄까요?”

박물관장 엔젤라가 자상하게 말을 건넨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의 둘쨋날. 어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국골프박물관 2층에 자리잡은 카페 겸 식당에서 만나 아침 커피를 들고나온 두 사람은 모래사장의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었다.

세인트 앤드루스 바닷가의 모래사장은 이끼가 낀 부분으로 먼저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끼가 아니라 이곳 바닷가에서 자라는 특유의 잡풀이었다. 땅 표면에 바짝 붙어 마치 넝쿨처럼 엉켜있지만 위로는 자라지 않는 잡풀이라서 이끼처럼 보였을 뿐이다.

“너무도 어두운 시절이었죠. 유럽 대륙이 십자군 전쟁을 치르느라 2백년을 허비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그 와중에서 백년전쟁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치르고 있었죠. 저기 보이는 언덕 윗쪽에 헨리라는 양치는 목동이 살고 있었죠.”

엔젤라는 초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먼 바다를 응시했다. 두 사람은 6백년 전의 세인트 앤드루스 바닷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1458년 북해의 바람은 갈대 밭을 지나 구릉위에 지어진 초라한 벽돌집을 쓸쓸하게 때리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런 집을 카티지(Cottage)라고 불렀다. 세인트 앤드루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이 집은 동쪽으로 문이 나 있었다. 자그마하고 볼품없는 시골집이었지만 맑은 날에는 동쪽 북해 바닷가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전망이 근사했다.

어느덧 70세를 훌쩍 넘긴 헨리는 오래전 양치는 일을 접었다. 그의 일상은 오늘처럼 현관 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앞에 펼쳐진 바닷가를 바라보는 거였다. 60년 지기인 옆집의 찰스도 헨리에게 손짓하며 낡은 나무 의자를 가지고 나와서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 바닷가에서 부는 바람, 모래사장을 따라 늘어선 잡풀, 그리고 구릉 지대는 70년을 봐도 변하지 않았다.

“배가 언제쯤 들어오려나”

헨리가 지나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는 배는 북해 동쪽 끝의 650킬로미터나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오는 무역선이었다. 상인들이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싣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항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항구는 축제 분위기가 되곤 했다.

지금은 거동이 힘들어 장날의 항구에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하지만 헨리는 60여 년 전부터 무수한 장날의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머리 속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항구에서 열리는 장터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항구의 장날을 특별히 좋아했던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배에서 내릴 때 쯤이면 늘상 골프 클럽을 한 꾸러미씩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빨리 출발해야죠.”

할아버지를 채근하는 그의 마음은 급했다. 할아버지가 집 앞에 대기시켜놓은 마차에 헨리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연달아 재촉했다. 장터에서 팔려고 손수 만들어 놓은 나무 연장들을 챙기는 할아버지의 부산한 움직임엔 아랑곳 않고 헨리는 또다시 재촉할 판이었다.

오늘은 리스항에 네덜란드 무역선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그 배가 들어오면 에딘버러 시의 분위기는 축제와도 같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장터가 열리는 항구에 모여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었다. 그날만 손꼽아 기다려온 헨리가 할아버지를 재촉하는 게 당연했다. 새벽부터 출발해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에딘버러까지는 한나절이나 걸리곤 했다. 장이 열리는 항구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는게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항구로 떠나는 마차 안에는 챙겨나온 연장으로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직접 만든 연장들을 팔아 필요한 생필품과 바꾸곤 했다. 마차 뒤에 앉은 헨리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봄 날씨도 아랑곳 않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어린 시절 항구의 장날을 기억하며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간 헨리의 눈은 지긋이 감겨있었다.

“여보게 찰스, 다른 목동들하고 골프 칠 때를 기억하나? 자네하고 내가 내기를 제일 많이 했지.”

10여 살 남짓 나이에 양떼를 몰던 목동들끼리 초원에서 했던 놀이는 60년도 훨씬 더 전이었다. 누가 더 적게 쳐서 들토끼 구멍에 돌을 넣을까를 놓고 무던히도 싸우곤 했다. 가장 많이 싸웠으면서도 친했던 친구가 찰스였다. 싸움은 목동들끼리 뿐 만이 아니었다. 바닷가에서 하선을 하던 어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모래사장에서 더 많이 싸우곤 했던 기억도 아스라히 떠올랐다.

동쪽 북해 바닷가에 위치한 수도 에딘버러는 만으로 이어지는 바닷길 안쪽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황량한 바닷바람을 맞고 살기는 세인트 앤드루스와 마찬가지였다. 14세기의 마지막 2년이 남은 1398년의 에딘버러 바닷가는 그렇게 쓸쓸했다.

왕족과 기사, 귀족과 영주들은 삶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헨리같은 서민들은 아무런 낙이 없는 중세의 암흑시대였다. 헨리는 그 항구도시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인트 앤드루스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양치는 목동이었다. 9살의 나이였던 그가 자라면서 보아 온 것은, 갈대와 모래, 초원과 구릉 뿐이었다.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양을 몰고 지키는 일이 전부였다.

7살 때부터 시작한 양치는 일은 늘상 무료하고 따분하기만 했다. 유일한 즐거움은 한가지,바로 무역선이었다. 그 배들은 너무도 큰 궁전과도 다름 없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항구로 나가, 북적거리는 시장터를 한 번씩 구경하는 게 삶의 희망같았다. 할아버지가 예전에 무역선을 탔던 선원이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배들은 동쪽 대륙의 끝에 위치한 네덜런드에서 온다는 말도 들었다.

14세기 말 당시 서유럽은 중세기의 끝자락에서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바다 건너 남쪽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은 11세기부터 2백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온 대륙이 어지러웠던 막바지 무렵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그 전쟁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남쪽 잉글랜드가 십자군 정복사업에 끼어들어 영국의 전체 분위기 역시 어수선 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역사 이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두 나라 간의 골은 너무도 깊었다.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캘트족과 앵글로 색슨족의 싸움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야 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337년에 시작된 백년전쟁을 겪고있는 중이었다. 반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1295년이래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스코틀랜드도 적국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를 작금의 백년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침공으로 만회할 작정이었다. 잉글랜드는 전쟁과 정복이 최우선이었기에, 이웃한 스코틀랜드는 언제 그들이 침공할지 몰라 하루도 감시를 게을리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먼저 전쟁을 벌이는게 스코틀랜드는 국력을 소모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전형적인 캘트족의 후손이었던 헨리는 그 어둡고 캄캄했던 14세기 암흑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 더 커서 싸움터에 나가던가 아니면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수도원 안에서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인근의 홀리루드 수도원이나 혹은 조금 떨어진 글래스고, 로슬린 등 수도원에서 주교들의 심부름을 하며 평생 갇혀 사는 일 뿐이었다.차라리 어려서부터 목동이 된 것에 대해 그는 다행스러워하고 있었다.

인근에서 자기처럼 양을 치던 또래의 다른 목동 아이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대립 상황에서 남자들이 12살이 되면 무조건 활쏘기 연습을 시킨 뒤 적당한 때 그 어린 나이에도 전쟁으로 끌려가고는 했던 시절이었다. 시대 상황은 너무도 고달프고 어둡기만 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고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 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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