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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주먹 대신 복싱 ‘복싱판 박항서’ 김상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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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열한 거리>(2006)의 포스터.


# 조폭의 세계를 가장 리얼하게 그린 한국영화를 꼽으라면 ‘비열한 거리’(2006)는 보통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이 영화를 만든 유하 감독은 앞서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로 학교폭력을 다뤘고, 2014년에는 ‘강남 1970’으로 폭력세계의 스케일을 한층 키웠다. 리얼한 조폭영화를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극중 감독처럼 실제 아름아름 알고 있는, 고향 친구라던가 하는 조폭을 만나 취재했다. 이를 영화 '비열한 거리'에 많이 반영했다." 유하 감독은 열심히 현실을 취재했다고 한다.

# 김상범 대표는 건달이었다. 그것도 '전국구'로 불릴 정도로 제법 잘나가는. 그리고 그 과거를 억지로 숨기려고 하지 않느다. 그는 “제가 한때 주먹을 썼던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지금은 복싱이 너무 좋고, 그것 하나만 잘하기에도 바쁩니다.” 실제로 프로복싱계에 탐문하니 김상범 대표는 복싱, 그것도 자신이 뿌리를 내린 베트남의 복싱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최대한 활용한다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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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박항서 감독(오른쪽)을 만난 김상범 대표.


# 베트남 호치민에 위치한 커키 버팔로 체육관(& 프로모션)의 김상범 대표(49)는 6년째 복싱인으로 살고 있다.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베트남은 물론,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등의 복서를 키우고 있다. 5년 전 베트남 한인타운에 복싱체육관을 연 것이 시작이었고, 2년여 전 베트남 최대 규모인 지금의 체육관을 직접 건축해 오픈했다. 한국 프로복싱은 사상 최악의 침체기에 접어든 지 오래됐고, 베트남 복싱은 이제 막 시작이다. 그러니 돈이 많이 든다. “저는 본격적인 베트남 진출 1세대쯤 돼요. 20년 전에 베트남에 와서 안 해본 게 없어요. 그러다가 5년 전부터 복싱을 하고 있습니다.”

# 베트남 여행 중 잠깐 짬을 내 커키 버팔로 체육관 취재에 나섰다. 김 대표가 툭하면 베트남이나 우즈벡 선수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경기를 하고, 또 베트남에서 복싱대회를 자주 개최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베트남 최초의 아시아챔피언을 배출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약속된 날에 전화를 걸어 '푸미홍 한인타운'이라고 하니 대뜸 “뭐가 보이세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첫눈에 들어오는 한글간판을 이야기하니 “잠깐만 거기서 기다리세요”라고 하더니 10분 만에 김 대표가 직접 차를 몰고 왔다. 점심을 어디서 먹었고, 호텔이 어디라고 하니 “아, 거기 사장님은 10년 전에 호치민에 왔는데, 처음에 고생 많이 하시다가 지금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어요. 호텔은 제 친구가 하는 곳이고, 그 옆 환전소와 이발소는 그 친구의 친동생이 하고 있어요. 제 이름 말하셨으면 조금이라도 잘해주셨을 텐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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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촬영한 커키 버팔로 체육관의 외관. [사진=손민준 씨 제공]


# 지상 4층, 연면적 900㎡ 규모의 커키 버팔로 체육관은 시설이 서울 강남의 고급카페 수준이었다. 정규시합을 할 수 있는 복싱링(3층)에 이종격투기 경기장(4장), 여기에 웨이트트레이닝 장 커피숍 기념품매장 그리고 사우나까지 갖추고 있었다. 각종 복싱소품이 멋들어지게 인테리어로 장식돼 있었고, 심지어 400만 원을 주고 사온 파키아오의 진품 챔피언벨트까지 있었다. 직원 30명에, 소속 선수는 베트남 우즈벡 필리핀을 모두 합해 9명. 더 놀라운 것은 차로 20분 거리에 공연장을 겸하는 복싱경기장을 올해 안에 착공한다는 소식이었다. “지금은 관원이 300명 정도 되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체육관이) 적자가 아주 심해요. 그래서 1, 2층에 상가를 넣고 3, 4층은 터서 공연장 겸 복싱경기장을 하는 건물을 짓기로 확정했어요. 목돈이 들어가지만, 상가와 공연장 수입이 생겨 재정자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 김상범 대표는 요즘 더 바빠졌다. 오는 29일 호치민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캄보디아의 바벳(목바이)에서 자신의 베트남 여자 프로복서, 응웬 티 투 니(23)가 WBO 아시아퍼시픽 미니멈급 타이틀매치를 벌인다. 이어 4월에는 투 니가 베트남 사상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도전할 계획이다. 4월 세계타이틀매치의 1안은 베트남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한국의 안산에서 개최하는 것이고, 2안은 호치민의 응후엔후에 광장에서 거리응원 5만 명으로 치러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베트남 TV가 생중계한다. 요즘에 인기도 없는 무슨 복싱을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이는 한국이 지독하게 못살았던 1966년, 김기수가 한구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WBA 주니어미들급)이 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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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탄생으로 기대를 모으는 투 니의 4월 세계타이틀매치의 1안(한국 안산) 포스터.


# 이 정도면 김상범 대표는 ‘복싱판 박항서’, 혹은 ‘베트남의 돈 킹(세계적인 프로모터)’으로 불릴 만하다. 실제로 박항서 감독은 김상범 대표가 베트남 복싱 발전에 힘을 쏟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몇 차례나 직접 만나 격려를 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2월 2일 하노이에서 김상범 대표와 투 니 등 선수들을 불러 용돈까지 줬다. 이는 ‘탄니엔’ 등 베트남의 주요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됐다. 여기에 '한국 프로복싱의 레전드' 유명우, 홍수환, 그리고 유명 연예인들까지 김 대표를 응원하고 있다. 이쯤이면 김상범 대표의 복싱 열정은 확실하다. 그래도 궁금했다. 그 진짜이유가. 그래서 취재를 마칠 때쯤 노골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복싱을 안 해도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렇게 복싱에 매달리는 겁니까?”

# 김상범 대표는 잠깐을 생각하더니 좀 긴 대답을 내놓았다. “저는 주먹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도 술, 도박 등은 일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못나게 살면서 후배들을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제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요.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수차례 있었죠. 폼 잡는 것, 쉽게 돈 버는 거, 이런 거 이제는 관심 없어요. 말을 해도 안 듣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이런 겉멋에 빠지는 것도 반대합니다. 한 번 살면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꼭 하고 싶었는데, 그게 복싱이었죠.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 그동안 프로복싱이 없었고, 젊은이들은 유럽축구 도박에 빠져 있어요. 복싱은 베트남에 도움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복싱을 하면서 주먹으로 먹고사는 일은 접었습니다. 아니, 복싱을 위해서라면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예전 지인들에게 후원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복싱이라는 또 다른 주먹의 문법에서 꼭 성공하고 싶습니다.” 이쯤이면 영화 같은 스토리다. 나중에 책이나 영화를 만들면 되겠다는 덕담에 김상범 대표는 “하하, ‘비열한 거리’라는 영화 아시죠? 그 영화, 제가 좀 도와드렸어요. 조직 합숙소, 도박장, 다리 밑 싸움 등은 제가 알려드린 그대로 영화에 나왔지요.” [헤럴드경제 스포츠팀(호치민)=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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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가운데)은 지난 2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커키 버팔로 체육관 식구들을 격려했다. 맨 왼쪽이 김상범 대표, 그 옆이 응웬 티 투 니. [사진=커키 버팔로 체육관 제공]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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