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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한 전직 골키퍼의 ‘R=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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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나온 '꿈꾸는 다락방'의 10주년 개정증보판 표지. 부제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공식, R=VD'가 적혀 있다.


# ‘줄리의 법칙(Jully's law)’이란 게 있다. ‘성공과 행운은 인간의 간절한 바람과 의지에서 태어난다’는 것인데, 2019년 1월 한 퀴즈쇼의 문제로 나오면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바 있다. 각종 시사상식에도 꼭 알아둬야 할 주요용어로 다뤄지고 있다. 머피의 법칙, 샐리의 법칙에 이은 3탄쯤 된다. 좀 당혹스러운 것은 이렇게 화제가 되는 ‘줄리의 법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구글검색으로 파악한 결과 영어권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다. 이런 게 왜 중요한 시상상식이고, 취업을 위해 알아둬야 하는지 모르겠다. 같은 내용을 근사한 표현에 담아내려면 차라리 'R=VD'가 낫다. 이는 유명한 베스트셀러 ‘꿈꾸는 다락방’이 제시한 것으로 ‘생생하게(Vivid) 꿈꾸면(Dream) 이루어진다(Realization)’는 의미다. 이 책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에스테 로더 등 풍부한 사례를 들어 이 공식을 설명했다.

# 190cm의 큰 키에 훤칠한 외모. 도시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촌에서도 ‘촌놈’으로 불렸다.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 입학 무렵 전남 깡촌에 있는 친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나주시 세지면 동곡리. 대도시는 물론, 나주에서도 촌놈으로 불릴 정도로 시골이었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좋았던 그는 나주 영산포초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이후 무안망운중-순천고를 거쳤다. 포지션이 골키퍼였는데 참 잘했다. 초중고 시절 ‘전남에서 가장 잘하는 골키퍼’였다. 중고교 시절 망운중과 순천고는 전남에서 잘 지지 않았다. 0-0 무승부에 승부차기에서 그가 두세 골을 막아 이기는 경기가 많았다. 시골이지만 그래도 만화 같은 캐릭터였다.

# 대학은 성균관대(스포츠과학부)로 진학했다. 연세대와 한양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워낙 잘했던 까닭에 동기들의 진학과 맞물리며 중학교 때부터 ‘진로’는 결정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어려서도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기에 운동을 열심히 한 그는 대학에서 학교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처음에는 장학금을 계속 받기 위해 학점관리 차원에서 수업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공부를 접하니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남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공부하는데 나는 축구 덕에 공짜로 공부한다’고 생각하며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수업을 듣고, 책을 읽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대학리그의 정상급 골키퍼로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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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골키퍼'의 서울이랜드FC 시절 프로필 사진.


# 프로무대 이야기이니 주인공의 이름을 밝혀두자. 2017년 12월 서울이랜드FC에서 은퇴한 이상기(32)다. ‘이’ 선수는 성균관대를 졸업하면서 2010년 성남일화(현 성남FC)에 들어갔다. 당시는 성남이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정성룡 조병국 최성국 등 쟁쟁한 선배들이 즐비했다. 골키퍼 포지션의 특성상 대표팀 발탁은 물론이고, 프로무대 출전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후 명문구단인 수원삼성으로 이적했고, 역시 벤치를 지키다 상주상무에 들어갔다. 프로선수로는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경기를 많이 뛰었고, 성적도 좋았다. 다시 삼성으로 복귀하고, 이후 수원FC-강원FC를 거쳐 서울이랜드에서 유니폼을 벗은 것이다. 나름 선수로도 성실하게 운동한 까닭에 2018년 2월 서울이랜드는 제법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2,000만원의 전별금까지 줬다.

# 선수생활 20년, 이중 8년은 프로축구선수였던 이상기 씨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다. 서정원 전 수원 감독이 “(이)상기처럼만 운동해라”라고 자주 말할 정도로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다른 일도 병행한 것이다. 대학 때는 선수단 숙소 베란다에서 라면을 끓여 판매하는 등 간식 사업(?)을 했고, 프로 때는 원정을 가면 감독들이 호텔방 하나를 더 잡아줄 정도로 선수들을 위한 ‘팀내 클럽’을 운영했다. 여기서 지도자 및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박항서, 신태용 감독의 신뢰를 얻었고, 수원시절에는 정대세 선수의 멘털 케어까지 맡았다. “할머님이 키워주신 까닭에 운동에서는 최고가 되려고 늘 노력했고, 또 운동을 하면서도 올바른 방식으로 용돈을 벌곤 했습니다.” 축구단 내 작은 비즈니스를 넘어 ‘선수’ 이상기는 파워블로거, 웹툰작가까지 됐다. “텅빈 경기장을 보면서 과연 팬들은 누가 데려오는 것일까를 고민했습니다. 팬과 소통하기 위해 블로거 활동을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웹툰까지 참여했죠.” 이런 걸 다하면서 선수생활도 모범적으로 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 그가 운동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공부였다. 선수생활 말미인 서울이랜드FC 시절 서울과학기술대의 스포츠심리학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20년 넘게 경험한 댄 해리스 코치의 영향을 받아 스포츠과학적인 지식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석사과정 때 알게 된 장익영 한체대 교수와는 인생의 인연을 맺어 지금도 수시로 연락한다. 본격적으로 스타트업에 착수하면서 석사과정은 수료만 했지만 공부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또 현역 프로선수가 석사과정을 밟으니 주위에서도 기특하며 많이 도와줬어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 이상기 씨는 이제 ‘선수’가 아닌 유망 스타트업기업의 ‘대표’다. 선수 때 번 돈은 부모님께 드리고, 학비로 충당하는 등 거의 소진했다. 그래서 은퇴지원금으로 받은 2,000만원으로 2018년 초 서울 삼성동에 아주 작은 사무실을 하나 차렸다. 회사이름은 QMIT(Question Management Information Technology). 절절한 스포츠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와 지도자, 구단관계자 들에게 필요한 효율적인 팀관리 플랫폼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결국 ‘팀 매니저’라는 어플리케이션(프로그램)이 나왔다. 이 프로그램은 2018년 여름 베타 서비스에 이어 11월 정식 출시됐는데 이미 국내 30여 개 팀이 쓰고 있다. 프로그램 개발 과정에서 중소벤처기업부 지원사업인 ‘스마트 벤처캠퍼스’에 합격했고(4월), 수원시 주관 스타트업 콘테스트 입상(6월), 도전K 스타트업 서울지역 대회 1위(8월), 중소벤처기업부 데모데이 1위(11월) 등 2달에 한 번꼴로 인정을 받았다. 공적자금을 지원 받아, 사무실과 직원을 늘렸고, 투자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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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이상기 '대표'가 휴대폰으로 자신이 만든 팀매니저를 보이며 포즈를 취했다. [사진=권지수 기자]


# 이상기 대표는 사업과는 별도로 한국스포츠심리학회 최우수 멘털 코치, 스포츠 심리상담사( 3급),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인재육성 자문위원, 대한체육회 은퇴 진로 강사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이렇게 자가진단을 내렸다. “성공은커녕 이제 첫 걸음을 내딛은 겁니다. 그래도 선수 때 이상으로 즐겁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긍정적이라서 뭐든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내가 발전하는 계기로 삼았죠. 그리고 운동을 한 까닭에 체력이 좋습니다. 여기에 스포츠맨십으로 다져진 성실함과 승부욕까지. 이런 게 지금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모르겠다. 축구선수 출신인 이상기 대표가 앞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할지를. 뭐 성공의 기준이 다 다르니 사실 이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뭐 하나 유리한 게 없는 환경에서 아주 밝고, 열정적으로 산다는 사실이다. 인터뷰를 끝낼 때 그가 건넨 말 한 마디도 가슴에 꽂혔다. “여자친구요? 사실 저 10월에 결혼합니다. 여자친구네가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꽤 괜찮은 집안이고, 저는 아직 내세울 게 별로 없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제 꿈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이 고맙습니다.” 맞다. 꿈이고, R=VD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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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대표(맨 위)와 QMIT의 직원들. 여자 3명 중 한 명이 10월 그와 결혼하는 예비신부다. [사진=QMIT]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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