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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라이더컵의 킹’ 세베 발레스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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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디오픈 우승 퍼트를 끝내며 환호하고 있는 세베 발레스테로스.


미국과 유럽의 위대한 골퍼라면 누구나 라이더컵을 거쳐갔다. 그들 중에서 ‘라이더컵의 킹’이라는 별명을 얻은 선수가 있었는데 바로 스페인의 골프 영웅 세베리아노(세베) 발레스테로스이다. 세베는 메이저 대회 5승을 올렸고, 유러피언 투어 50승으로 최다승자이며 상금왕을 6회나 차지했다.

1999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세베는 2011년 54세에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베는 역사상 가장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샷을 했던 선수로 인정 받았다. 선수들이 투표로 결정한 ‘역사상 쇼트게임을 가장 잘했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아있는데, 특히 라이더컵에서 유럽골프의 부흥을 이끄는 데 가장 앞장섰던 골퍼였고, 미국팀이 가장 두려워하는 선수였다.

스페인 북쪽 바닷가의 작은 마을, 페드레나

세베는 1957년 스페인 북쪽 인구 2,000명의 바닷가 작은 마을 페드레나(Pedrena)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 마을에는 페드레나 로얄골프클럽이 있었는데 멤버들은 외지의 부자들이었고, 휴가를 와서 골프를 즐기곤 했다. 마을의 아이들이 캐디를 하여 돈을 벌 수 있었는데, 세베의 4형제들은 모두 캐디를 거쳐서 프로골퍼가 되었다.

캐디들은 골프장에서 볼을 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세베는 바닷가로 나가서 골프볼을 치며 놀았다. 물이 들어왔다가 나간 모래는 적당히 굳어서 페어웨이와 비슷했고 물에서 먼 곳은 벙커와 같았다. 통조림 깡통으로 홀을 만들고 나무 가지도 세워서 홀을 흉내 냈다. 8살 생일에 선물로 받은 3번 아이언 한 개로 퍼팅, 벙커 샷, 칩샷 등 모든 샷을 해결했다.

세베는 13세 때 캐디 골프대회에서 71-65타를 치며 우승, 상으로 골프장에서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매일 아침부터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습에 매진한 세베는 14세가 된 다음 해에도 2등을 16타 차이로 누르며 우승하여 최고의 캐디로 인정받았다. 4형제 중에서도 최고였다. 아직 제대로 된 골프클럽도 갖추지 못한 소년의 놀라운 기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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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연습했던 바닷가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세베.


무조건 이겨야 했던 내기 골프

맏형 발도메로가 클럽하우스에서 클럽멤버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는데 어떤 멤버가 그 클럽멤버의 아들 에두아르도의 이야기를 꺼냈다. 스페인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각종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고 있는 아마추어의 최강자라는 이야기였다. 발도메로는 자기 동생 세베가 에두아르도를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멤버는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고, 주위의 다른 멤버들이 몰려들며 내기에 참가하겠다고 부추겼다. 결국 3만 페세타의 큰 내기가 성사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맏형 발도메로는 세베를 불러서 큰 내기골프에 나가야 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세베는 자기가 캐디 1,000라운드를 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 걸린 내기이므로 꼭 이겨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세베, 너 에두아르도에게 이길 수 있지?”
“형, 나도 골프클럽만 다 있으면 이길 수 있어요.”
“그럼 내 골프 클럽을 빌려줄게.”

드디어 약속한 날 오후 4시. 많은 멤버들과 캐디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시합이 시작되었다. 세베는 시작부터 에두아르도를 압도하더니 9홀이 끝난 후 32-37로 5타를 앞섰다. 10번 홀은 180m의 파3 홀이었는데 세베의 3번 아이언 티샷이 2m에 붙었고 에두아르도의 티샷이 그린을 벗어나자, 그의 아버지가 세베의 승리를 인정하며 시합을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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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오픈 우승컵을 들고 있는 세베.


프로가 된 세베

16세에 프로가 되어 출전한 첫 프로대회에서 세베는 20위를 하여 2,500페세타의 상금을 받았지만, 락커로 돌아온 세베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선배 프로가 그의 첫 시합 성적이 좋은 것이라고 위로했는데 세베가 울면서 말했다. “나는 우승하려고 왔어요.” 세베는 시합에 나가면 무조건 우승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세였던 1976년에 유러피언 투어 상금왕에 오른 세베는 1978년 처음으로 참가한 미국 PGA 대회에서 우승했고, 22세였던 1979년에는 디오픈에 우승하며 메이저 챔피언이 되었다. 세베는 20세기 이후 디오픈의 최연소 챔피언이었으며 그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80년 세베는 유럽인 최초로 마스터스에서 우승했고, 1983년에 다시 우승해 유럽골퍼들이 마스터스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 이후 베른하드 랑거(2회), 샌디 라일, 이안 우스남, 닉 팔도(3회), 올라사발(2회) 등의 유럽골퍼들이 마스터스를 정복하면서 미국 골프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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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가 1983년 라이더컵 마지막 홀에서 벙커샷을 한 후 볼을 주시하고 있다. 잭 니클라우스는 이 샷을 라이더컵 역사상 최고의 샷이라고 평가했다.

라이더컵에 올인한 세베


1979년 라이더컵부터 영국팀 대신에 유럽 전체에서 선발된 유럽팀이 미국과 대결하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가장 먼저 발탁된 선수는 당연히 세베였다. 1979년 라이더컵 대회에서 팀이 크게 패배했고, 자신의 싱글 매치도 래리 넬슨에게 패배한 세베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라이더컵에서 미국을 타도하는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았다.

유러피언 투어와의 불화로 1981년 라이더컵에 불참했던 세베는 1983년 마스터스 우승 후 캡틴 토니 잭클린의 설득으로 라이더컵 팀에 복귀해 미국으로 갔다. 세베는 승점 3점을 올리며 활약했지만 유럽팀은 1점 차이로 패배했다. 그러나 세베는 원정경기에서 1점 차이면 유럽팀이 이긴 것과 다름없고, 다음의 영국 매치에서는 유럽팀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동료들을 위로하며 돌아왔다. 사실 1983년 라이더컵이 끝나면서 미국과 유럽의 대등한 라이벌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1985년 영국의 벨프리 대회에서 세베는 승점 3.5점을 올리며 팀에 기여했고 유럽팀은 28년 만에 드디어 라이더컵을 차지했다. 세베는 미국 타도의 한을 풀었고 유럽팀이 미국에 대한 우위를 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베는 1987년부터 유럽팀에 선발된 스페인의 올라사발과 함께 같은 조가 되어 출전한 후 11승 2패 2 무승부라는 전설적인 성적을 남겼다. 1997년 스페인에서 개최된 라이더컵에서 세베는 캡틴을 맡아 평생의 라이벌 톰 카이트가 캡틴으로 활약한 미국팀을 제압했다. 세베는 라이더컵의 유럽팀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뤄냈다.

유럽팀은 지금도 라이더컵에서 어떤 선수가 특별히 눈부신 활약을 보일 때 ‘세베 발레스테로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칭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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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컵 역사상 최강의 조. 세베(왼쪽)와 올라사발.


단명한 천재


2011년 5월, 4년 동안 뇌암 투병 생활을 해 왔던 세베가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골퍼 중에서 세베처럼 일찍 세상을 떠난 선수는 없었다. 그는 오늘날의 강한 유럽골프와 라이더컵이 있게 해준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골프 명예의 전당에는 스페인 조기가 게양되었다. PGA 대회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는 전년도 챔피언 팀 클락이 챔피언 국가의 국기를 거는 자리에 자기의 영웅 세베 발레스테로스를 애도하는 스페인 조기 게양을 요청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We lost an inspiration, genius, role model, hero, friend…………”

영감을 주는 사람, 천재, 롤모델, 영웅, 친구. 세베는 그런 골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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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의 우아한 피니시 동작.



* 박노승 : 건국대 산업대학원 골프산업학과 겸임교수,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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