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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화도주의 골프남녀] 사라지는 미군 성남 골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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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 신도시를 내려다 보며 티샷 하는 성남골프장의 1번 홀.


이 골프장은 두 개의 숲 안에 있다. 위로는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 숲과 아래로는 위례 신도시 아파트 숲 안이다. 신도시 아파트 숲이 산 기슭과 만나 끝나는 곳의 입구 초소에서 신분증과 자동차 등록증을 내고 출입증을 받아 클럽하우스로 운전해 간다. 아무 꾸밈 없는 영내 도로 길섶에 개망초 꽃이 드문드문 하얗다.

‘미8군 성남골프클럽’ - 이름에 '성남'이 들어가 있지만 행정구역으로는 하남시 학암동에 있다. 미국의 행정 분류로는 미8군의 소재지인 캘리포니아 주에 든다고 한다. 티오프 30분 전에 1번 홀 앞 간이식당 같은 스타트 하우스에서, 우리는 김밥과 컵라면을 먹었다.

“여기 별미 메뉴예요.”

이곳의 회원인 ‘고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올해로 만 75세인 그는 미8군에서 22년간 복무하고 1997년 전역하여 이 골프장을 비롯한 미군 골프장들의 종신 회원이다. 그는 이곳에서 라운드 할 때 16달러를 낸다. 미8군이 운영하는 골프장인 이곳은 미군에 관계된 회원 또는 회원 동반자만 라운드 할 수 있다. 비회원인 우리는 그린피, 골프카트 이용료, 캐디비용을 합하여 17만원 쯤 낸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까닭에 수요가 많기에 다른 지역 미군 골프장보다 값이 두배쯤 비싸다.

김밥, 컵라면은 회원 비회원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동네 편의점과 비슷한 값을 받는다. 김밥은 미제 스팸이 들어있어 짭짤하며 기름지고, 컵라면은 국산이라 시내 편의점 것과 맛이 다르지 않다.

“고박사님 오랜만이네요.”

곱게 화장한 여성 캐디가 활짝 웃으며 반긴다. 나도 이 캐디를 몇 번 만났다. 용산 미군 기지에 골프장이 있던 40여 년 전에 캐디 일을 시작해서 1991년 이곳으로 이전할 때 따라와 일하고 있다고 했다. 몇 해 전에 환갑을 넘었다. 지난 번 왔을 때 함께 했던 47세 캐디는, 성남골프장에서 일하는 20여 명의 캐디 가운데 절반은 60살이 넘었고 자기가 가장 ‘꽃띠’라면서, 젊음을 자랑했다. 고박사는 캐디들을 동생 대하듯 ‘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부르며 스스럼 없다. 그가 ‘영국식 농담’이라며 건네는 싱거운 농담을, 캐디들은 ‘용산 시절 농담’이라고 눈을 흘기며 흘려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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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도열해 있는 성남 골프장의 파5 홀인 2번홀 전경.


1번 홀 그린이 바라보이는 저 너머로 아직 건설 중인 위례신도시 공사장이 널브러져 있다. 얕은 졸참나무 숲 너머로 철제 공사 펜스가, 그 펜스 너머에는 시뻘겋게 배를 드러낸 땅이 넓게 파헤쳐져 공사 중인 게 보인다. 라운드 동반자 중에 가장 젊은 40대 유통업자는 ‘옛날에 저 땅이 오만 원이었을 때 우리 아버지가 팔았다’ 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그 공사장 쪽을 향해서 뿔뿔이 티샷을 해서 라운드를 시작했다.

올해 봄에, 남한산성 서쪽 출입문인 우익문 전망대에 올라 이곳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롯데월드타워' 백 몇 십 층 건물이 뿌연 미세먼지 구름을 찌르고 군림하듯 올라 서 있는 것이 첫 눈에 보이고, 산 아래 가까이로는 위례신도시 고층 아파트가 다소곳이 오와 열을 맞추어 빼곡하다. 그리고 나무 숲이 시작되는 곳 한가운데로 이 골프장의 페어웨이가 배추벌레처럼 푸르게 누워 있으며, 그 옆이 붉은 흙 파헤쳐진 공사장이었다.

남한산성 우익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조선 왕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러 나온 문이다. 지금 롯데월드타워는 그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바닥에 아홉 번 머리를 찧으며 항복했다던 삼전도비 자리 바로 옆에 서 있다. 이 성남 골프장 자리는 우익문에서 삼전도를 직선으로 긋는 선상의 산기슭이다. 내가 걷고 있는 2번 홀 페어웨이 언저리가, 아마도 인조 일행이 겁에 질려 울며 내려가던 길 어림 아니었을까. 그 길은 알 수 없으나 지금 내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이 근처 땅의 숲과 능선에서, 이름 없는 백성들이 청나라 병사가 휘두르는 창칼에 어이없이 찔려 죽고 아낙네들은 끌려갔을지 모르겠다.

3번 파3홀은 고층아파트의 앞마당 같다. 티샷을 잘 치고 나니 바로 옆 아파트 베란다에서 누군가 ‘굿 샷!’하고 외친 것 같기도 같다. 이 골프장의 산 쪽 절반은 나무 숲, 아래쪽 절반은 신도시 건물 숲에 싸여 있다. 오르막 코스에서는 청량산 숲을 보고, 내리막 코스에서는 아파트 숲을 바라보며 쳐야 한다.

“평택으로 이사 가면 거기도 따라가서 다닐 건가요?”

내 물음에 캐디는 고개를 젓는다.

“일 할만큼 했어요. 애들도 다 커서 제 살림 나갔고……. 옛날에는 미8군에서 일한다면 다들 부러워했죠……. 이제 아마 평택까지 따라갈 캐디는 없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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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파 5홀인 12번 홀.


이 골프장은 올해 11월까지 영업하고 문을 닫는다. 새로 조성된 대규모 평택 미군기지에 새 골프장이 거의 다 만들어져 그곳으로 이사한다는 것이다. 문 닫는 분위기는 이미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평택 기지 신설 골프장에 부임한 미국인 매니저가 이 골프장도 관리하는데 1주일에 한 번 들러 돌아볼 뿐이고, 이곳은 오래 일해온 사람들이 관성적으로 운영한다. 1년에 두어 번 라운드할 뿐인 내 눈에도, 잔디가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고 클럽하우스를 비롯한 관리 시설도 어딘가 모르게 빛을 잃어 어두워져 가는 것이 올 때마다 조금씩 더 느껴진다.

"옛날 같으면 비회원이 여기 오면 스테이크 꼭 먹고 가라고 권했는데, 요새는 그럴 분위기도 아녜요. 밖에도 맛있는 게 많고……. 먹어본 사람들이 옛날처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메뉴나 맛은 옛날이나 똑같은데요……."

이런 저런 인연으로 나도 제법 여러 번 와 봤지만, 클럽하우스 2층 식당에서 미국 재료로 만든 스테이크와 햄버거 등을 먹은 기억이 처음 두어 번 이후로는 없는 것 같다. 고박사 말대로 지금은 오히려 김밥과 컵라면이 이곳의 별미인지도 모른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들이다. 미군들은 주말에 약간 올 뿐이고 회원 자격을 가진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한다. 얼마 전에는 비회원에게 그린피 쿠폰을 싸게 팔았는데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 다 팔렸다고 한다. 그 쿠폰 구매자들이 거의 매일 오듯 골프장을 자주 이용하고 동반자도 데려와 비싼 이용료를 내게 하여 골프장에 수익을 보탤 뿐더러, 2층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나 햄버거도 좀더 많이 먹는다고 한다.

“배 고프죠? 라운드 할 땐 간식 먹어야 해요.”

라운드 중에 고박사가 파우치 백에서 미제 과자를 꺼내 권한다. 미군 피엑스에서 싸게 사서 가까운 이들에게 늘 선물하는 달달한 맛 과자다. 어릴 때 이 ‘미제 맛’을 오래 선망했었다. 미제 과자, 미군용 전투식량, 미군 클럽 스테이크…… 미제 먹을거리를 생각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몸 속 깊은 곳에서 피어 오르던 젊은 날의 알 수 없는 허기를 나는 기억한다. 그 허기는 이제 늙어가는 세대의 기억에만 있는 것인가.

허기의 끝자락 쯤에 골프도 있었다. 하면 할수록 마약처럼 더 하고 싶은데 골프장은 귀해서 ‘골프 약속은 본인 사망 시 외에는 지켜야 한다’는 농담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그 무렵 이 골프장에서 처음 라운드 하던 날, 나는 ‘미제’와 ‘골프’가 어우러져 창자를 채워 들어오는 듯한 알 수 없는 포만감에 뿌듯했었다. 그날 매점에서 팔던 설탕 덩어리 간식 과자와 자동차 핸들만한 접시에 담아 나오던 티본스테이크의 뭉근한 푸짐함을 잊지 못한다.

“평택 기지에 더 좋은 골프장을 지었다면서요. 여기 없어지면 박사님은 거기서 주로 라운드 하시겠네요?”

내 물음에 고박사의 얼굴 표정은 약간 미묘하게 머뭇거렸다.

“평택까지…… 내가 가겠어요? 여긴 내 집 같아요. 풀 한포기 표정까지 알 정도죠. 처음엔 여기에 양잔디를 깔았는데 다 죽었어요. 요 옆에 있던 남성대 골프장 없어질 때 그 잔디 떠다 입히고 나서 얼마나 좋던지……. 지금도 라운드 하면 잔디 잎들과 대화하는 거 같아요……. 이제 숲도 무르익고, 코스 구성도 좋아졌는데 말예요.”

고박사 눈 안에서 잠깐 동안 아주 긴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다.

아까시 나무, 칡넝쿨이 아무렇게나 우거진 잡목 숲을 배경으로, 아파트 숲을 내려다 보며 치는 14번 150미터 파3홀에서 고박사가 목을 가다듬고 선언했다.

“오늘 제 생애 다섯 번 째 홀인 원을 축하해주러 여기까지 오신 젊은 친구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고박사의 티샷은 그린 앞 벙커에 빠졌고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크게 야유하고 장난치며 웃었다. 지그시 지켜보던 캐디가 ‘오십 살이나 일흔다섯 살이나, 재벌이나 동네 분식집 주인이나, 골프는 어린 애처럼 친구로 노는 거’ 라고 반쯤 득도한 수행자 같은 투로 말했다. 그녀는 수십년 동안 이 미군 골프장을 자주 다녀간 손꼽히는 부자, 정치인, 연예인 들에 대해 나머지 홀을 플레이 하는 내내 얘기했다.

“그 떠들썩하게 유명한 사람들도 골프 채 쥐면 다들 똑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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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숲을 내려다 보며 티샷을 해야 하는 파3 홀인 14번 홀.


마지막 홀에 고박사가 칩인 버디를 했다. 우리는 손바닥을 서로 맞부딪치며 천진한 어린애 표정이 되어 환호했지만 골프카트를 타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는 짧은 길에서 모두 순식간에 늙어갔다.

“바벨탑 같네요.”

동반자 중 한 명이 클럽하우스 저 너머 뿌연 도시 먼지와 엉긴 노을 속에 홀로 높게 솟아 있는 롯데월드타워를 보며 말했다.

“저게 남한산성보다 높아요. 꼭대기 전망대 올라가서 내려다 보니 대단합디다.”

또 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몸을 씻고 가락시장으로 나와 생선횟집에서 미군골프장 레스토랑 티본스테이크보다 비싼 민어회와 매운탕을 먹었다. 칼칼한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또 골프 이야기를 했다. 가장 선배이자 골프 지식에 정통한 고박사가 골프 룰과 매너 이야기를 할 때는 공손히 경청하였으며 미군 골프장을 자주 은밀히 다녀간 특권층 인사들의 골프 이야기에는 함께 혀를 차고 소주잔을 마주쳤으나, 미군 골프장이 옮겨가는 미군 평택기지 이야기가 남북관계로 이어져 기어이 정치로 화제가 번져가더니 의견이 엇갈리면서 서먹해졌다. '골프는 신사들의 스포츠'라고 호언하며 내기 골프를 하다가 매너를 둘러싼 신경전 끝에 서로 샐쭉해진 상황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고박사가 점잖게 수습하는 말로 자리를 정리하면서 우리는 주섬주섬 일어났다.

“가을에 다시 만나 라운드하고 클럽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읍시다.”

고박사의 수습용 발언이었는데, 일행들 얼굴이 갑자기 밝아지며 ‘아, 다음엔 스테이크 꼭 먹죠’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미군 성남 골프장이 없어지기 전에 라운드 하자'며 똑 같은 멤버로 가을까지 기다릴 것 없이 곧 다시 모이자고 하며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행 중 한 명이 ‘언제 스테이크 먹나’ 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미군 골프장보다 훨씬 고급인 골프장과 호텔의 회원이었는데 미군 골프장에서의 골프 라운드와 스테이크 먹는 약속을 재촉하는 것이다. '어제 스테이크 먹자고 하지 왜 그랬냐'고 하니, 어젠 생각이 없었는데 곧 마지막이라니 더 먹고 싶어지나 보다고 했다. ‘골프 치고 스테이크 먹고 싶어~’ 라며 느끼한 표정의 이모티콘이 달린 문자를 거듭 보내왔다.

내게도 어디 숨어 있던 것인지 모를 허기가 밀려왔다. 불현듯 필드로 나가고 싶어지고 미군 클럽의 커다란 스테이크가 떠올라 입에 침이 감돌았다. 이 나라 땅에서 20세기 후반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작용하는 조건반사임이 틀림없는 이 노예 같은 허기에, 나는 안쓰럽고 부끄럽다가 쓸쓸해졌다.
나의 골프 이야기는 언제 이 부끄러움을 벗을 것인가. 어쨌든 고박사께 예약을 청해야겠다.

글 / 류석무

도화도주(필명)는 기업 경영자입니다. 하는 일이 골프에도 다소 관계를 맺고 있어서 골프 상식에 밝고, 업무상 골프장을 많이 다니다 보니, 좀더 생각과 목적이 있는 골프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골프에세이를 쓰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문화잡지 편집인을 한 적이 있어 글쓰기에 익숙합니다(편집자 주)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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