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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공부하는 선수’와 상냥한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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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소설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애칭 ‘도시기록자’로 알려진 소설가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단숨에 읽히는 책이다. 평범한 삶 속의 위선, 아이러니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 대해 면전에서는 웃어주지만, 뒤에서는 천박한 험담을 한다. 죽도록 시험공부를 해놓고, 친구들 앞에서 “일찍 자버려서 공부 얼마 못했어”라고 내숭을 떤다. 누구나 해봤거나, 당해봤을 법한 익숙한 장면들이다. 중요한 것은 정이현이 이 현대인의 위선을 상냥한 폭력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폭력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오죽하면 이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철학자 슬라예보 지젝이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을까?

# ‘돈도 실력’이라는 정유라의 못된 일갈 때문에 한국의 학교(엘리트)체육에 난리가 났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운동선수를 배려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자명한 논리가 고압적으로 현장을 억누르고 있다. 학생선수에 대한 학사관리가 철저해지고, 체육특기생은 정유라와 같은 신분이었다는 점 때문에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다. 소속선수가 운동경기에서 엄청난 성취를 올렸을 때 플래카드까지 걸고 난리를 쳤던, 그리고 스포츠스타를 신입생으로 영입하기 위해 열을 올렸던 학교와 교육자 들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학생선수에게 “니 사정은 됐고, 공부하는 게 맞다”라고 다그친다.

# 정유라의 반작용으로 ‘공부하는 선수’가 학교체육을 휩쓸면서, 황당한 현상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고등학교 프로골퍼인 A는 특기자로 들어간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어 자퇴했다. 한때는 학생 프로에 대해 ‘신동’이라고 열광해놓고, 지금은 ‘학생프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명문 B대학의 골프선수들도 줄지어 휴학을 하고 있다. ‘한국탁구의 미래’로 불리는 중학생 C는 사비로 유럽오픈대회에 나가는데 고작 한 대회만 뛰고 돌아온다. 비싼 항공료 탓에 보통 2~3개 대회는 뛰고 와야 하는데 교육청이 만든 출전제한에 걸렸기 때문이다.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 분야에는 관대하면서 유독 체육에만 까칠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참 편의주의적이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위정자들과 교육 담당자들에게서 위선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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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체육특기자 선발 및 학사관리 개선방안 심포지엄의 모습. [사진=안민석 의원실]


# 대학입시제도를 바꾸어도 3년의 유예기간이 있다. 그렇다면 학생선수에 대해 변화된 지침을 적용한다면 이것도 이전의 룰대로 학교에 진학한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연착륙 기간을 주는 것이 상식일 게다. 바뀐 룰 이전의 선택을 내 문제가 아니라고, 혹은 내가 지금 그렇게 정책을 집행해야 살아남는다고 깔아뭉개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행위자도 아닌데 그렇게 소급적용을 강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 “지금 얘기하는 게 이렇잖아요. 운동 좀 한다고, 공부하지 않고 대학졸업장 쉽게 받아가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좋습니다. 어차피 골프만 해온 아이고, 앞으로 골프로 먹고 살 겁니다. 그러니 대학 안 다니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해결해주세요. 골프를 하는 동안 29세(현행법 상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이 나이까지는 병역을 연기할 수 있다)까지는 강제징집 당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군대를 안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인생을 걸고 운동을 하는데 대학에 적이 없다고 군에 입대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잖아요. 대학요? 남자선수들은 휴학하면 바로 영장 나와요. 그래서 돈도 많이 들고, 학교 측에 굽신굽신하면서 적을 두는 겁니다. 병역연기에 있어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은 되고, 운동하는 건 왜 안 됩니까? 생각하면 참 폭력적입니다.”

# 대학생 프로골퍼 D의 아버지가 한 말이다. 반박할 구석을 찾기 힘들다. 실제로 외국투어에서 빼어난 성적으로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한 대학생 프로는 최근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경비도 1,000만 원이 넘게 들고, 경기력 유지에도 악영향이 있지만 학사관리를 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고, 그러면 영장이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책이었다. 상황이 이렇자, 남자프로골퍼들의 부모들이 이와 관련된 서명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이는 비단 골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군입대를 연기하기 위해 내키지도 않은 대학원에 적을 두는 남자선수들이 즐비하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 적을 두면 공부를 제대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위선에 가깝다.

#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리고 현재 학생선수에 대한 우리네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자명하다. 그래서 고치겠다는 것도 좋다. 그런데 개혁에는 정당한 절차와 방법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금처럼 밀어붙이기 식의 정책은 담당자들이 편할 수는 있지만, 애먼 피해자가 양산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폭력이고, 위선이다. 방향이 좋으니 ‘상냥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엘리트학교체육 현장은 정이현의 소설처럼 분위기가 참 서늘하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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