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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복싱챔피언 김지원과 ‘연극계 대모’ 김지숙의 못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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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인 배우 김지숙과 포즈를 취한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김지원.


인트로 - 실패한 복서의 인생성공

복서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맡은 분야에서 우뚝 선 선후배들을 보노라면 흐믓한 미소가 절로 머금어집니다. 사실 권투 잘하는 것도 만 가지 재주 중에 하나일 뿐이기에 권투로 금자탑을 쌓았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권투에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고 움추릴 필요도 없다 하겠습니다. 왜냐면 신(神)이 인간을 창조할 때 저마다의 소질 한 가지씩은 선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인왕 출신의 사촌형 지말오를 따라 복싱을 수련했던 지명환 씨(1970년생 여천)도 그중 한 명이죠.현재 하남시 신장에서 호프광장을 운영하는 그는 과거 태평양체육관(관장 김수철)에서 복싱을 배우며 프로테스트에 합격해 신인왕전을 목전에 둔 유망주였죠. 하지만 지명환은 불의의 사고로 신인왕전 출전이 좌절되자 욱하는 마음에 특전사에 자원입대하며 복싱 캐리어를 마감했습니다. 이후 1993년 12월 군복무를 마친 후 치킨프렌차이즈 사업을벌여 현재 수도권에 13개의 체인망을 보유한 어엿한 사장님이 됐습니다. 지명환은 복싱할 때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고, 세상사에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임했기에 나름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복싱체육관을 차려 후진양성에 동참할 뜻도 피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명환은 복싱을 훈련할 때 “땀을 적게 흘리면 실전에서 피를 많이 흘리듯이 세상에 꽁짜는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복싱인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남시 신장동에서 종합광고회사를 운영하는 김남기 사장(58년생 정읍)은 주말도 없이 작업복을 입고 분주히 활동하는, 종업원 10명을 거느린 회사의 대표입니다. 정읍체육관(관장 박순배)에서 1975년 복싱에 입문해 1978년 제8회 대통령배대회에 전북대표(밴텀급)으로 출전했지요. 당시 전남의 김동길에게 판정으로 패하는 등 이렇다 할 아마추어성적은 없었고, 1982년 오성체육관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해서도 오장균(조치원)에게 패하는 등 3승2패의 그저그런(?)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근면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작은 성공을 일궜습니다. 1988년 50평대 단독주택을 구입해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매달 일정한 수입을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쾌척하는 등 소리없는 선행을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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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남기, 지말오, 지명환 대표.


‘게으른 천재’ 김지원


오늘 링사이드산책의 주인공은 아마추어 국가대표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쾌남아 김지원(58년생 남산공전-경희대)입니다. 그를 만나러 그의 누님인 배우 김지숙이 거쳐하는 일산백석역 인근으로 향했습니다. 김지숙 씨는 연극계의 대모로 성균관대 연기예술과 교수를 엮임했습니다. 봄날의 향긋함 속에 남매와 3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면서 저만의 작품(?)인 이 칼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김지원은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역대 6명 중 한 명입니다(나머지 5명은 김기수 박찬희 문성길 변정일 조인주). 게다가 국내복서론 최초로 세계타이틀을 자진반납한 복서이자, 무패로 은퇴한 최초의 복서였죠(19전 17승 2무 7KO). 복서로도 이처럼 특별했던 김지원의 가족은 더 특별합니다. 그의 막내동생이 영화 <놈놈놈>, <밀정>, <반칙왕>으로 유명한 김지운(64년생) 감독이고, 사촌형님은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밴텀급 국가대표 출신의 강타자 김창석(52년생 전상무감독)이죠. 김창석은 당대 최고의 복서인 유종만 이거성 박인규 황철순과 승패를 주고 받았던 명복서랍니다. 여기에 배우 김지숙이 누나이니 복싱계에서는 ‘로열 페밀리’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김지숙 씨는 “동생 지원이가 심성이 착해 상대의 말을 너무 잘 믿는게 큰 흠”이라고 일갈한 후 “그 때문인지 연희동아파트가 담배연기처럼 사라지는 등 굴곡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안타깝다”고 회고했습니다. 김지원의 복싱에 대해서는 “지원이는 유년시절 동네에서 쌈박질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마도 복서DNA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듯합니다.

김지숙-지원-지운의 부친은 일본육사를 나와 인사장교(중령)로 예편한 후 대서소를 운영하며 나름 풍족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부친은 말 그대로 무골호인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모친은 당시에 의식이 깨어있던, 리더십이 강한 신여성였다네요. 김지숙 씨는 “지원이는 아버지 품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본인과 막내 지운이는부모의 장점을 반반씩 닮아 맡은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세계챔피언을 지낸 김지원은 누님의 말씀에 순한양처럼 옆에서 묵묵히 경청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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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엣으로 노래하고 있는 김지원과 장덕.


배우 누나와 영화감독 동생


복서 김지원은 사촌형의 영향으로 복싱에 입문합니다. 보인상고를 다니면서 반도체육관의 신현옥 관장으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복싱사관학교로 통하는 남산공전으로 편입하면서 스타탄생의 서곡을 알립니다. 동기생이 세계챔피언 유제두의 친동생인 유제형(58년생 고흥)이었고, 1년후배가 장윤호(59년생 한체대)였죠. 김지원은 남산공전 3학년 때인 1977년 재7회 학생신인대회와 제27회 학생선수권에서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반도체육관 소속으로 제4회 킹스컵대회 선발전에 출전해 박찬희를 3차례꺾은 것으로 유명한 유옥균(조선대)을 결승에서 판정으로 꺽으며 처음으로 국가대표(플라이급)에 발탁됩니다. 김지원은 사우스포(왼손잡이)로 순발력과 동체시력이 뛰어난 복서였습니다. 그러나 킹스컵 본선에서는 후에 WBC슈퍼플라이급챔피언에 등극하는 라파엘 오로노(베네주엘라)에게 2-3패으로 석패했습니다.

그후 김지원은 그해 4월 제4회 아시아청소년대회에 정택동(동대문상고) 황충재(한체대) 등과 함께 출전하여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때 김지원은 누님 김지숙과 서울 모처에 아파트를 얻어 함께 생활하면서 자기분야에서 각각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예컨대 아침 로드웍이 끝나면 김지원은 기타를 치면서 조용필, 김정호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누님 김지숙은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979년 3월 김지원은 수경사에 입대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평소 절제력(?)이 부족했던 김지원은 군생활로 체계적인 훈련을 시작하자 숨어있던 포텐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것입니다. 1979년 세계군인선수권(베네수엘라)에서 한국의 유일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당대 최고의 복서라는 찬사를 들었고, 이어 1980, 81년 킹스컵대회에서 플라이급과 밴텀급에서 연속으로 우승했습니다. 1980년에는 아시아선수권마저 제패하며 최고의 복서 반열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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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의 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하는 김지숙-지원 남매.


노력하던 천재의 좌절 ‘아! 모스크바 올림픽’


김지원은 모스크바올림픽선발전 최종결승에서도 국가대표 간판 오인석(한체대)을 제압하며 출전티켓을 획득했습니다. 오인석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이병욱(북한)을 꺾은 강호였죠. 하지만 이처럼 잘나가던 김지훈은 정치적 이념 관계로 한국의 모스크바올림픽 출전이 무산되면서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김지원은 황철순과 함께 올림픽 메달권에 가장 근접한 복서 중 한 명였기에 안타까움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만일 김지원이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획득했다면 그의 복싱 인생도 크게 바뀌었을 겁니다.

김지원은 1981년 제1회 마르코스배대회(필리핀)에 출전합니다(참고로 대통령 마르코스도 아마추어에서 기량도 출중했던 전직복서입니다). 이 대회 준결승에서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인 칸탄치오(필리핀)에게 판정으로 패했고, 같은해 세계군인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태국의 복싱영웅 파야오 풀타라타에게 고배를 마셨습니다. 올림픽 출전의 꿈이 무산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김지원은 군재대와 더불어 전격 프로행을 선언했습니다. 오작교 역할은 손영찬 동아대 감독였죠. 1982년 경희대에 입학한 김지원은 그해 1월 프로에 데뷔합니다. 통상 아마추어 대표선수들이 프로에 전향하면 의외로 성공확률은 떨어지는 게 정설이었습니다. 황철순 김정철 정택동 유옥균 김주석 김치복 김광선 오광수 등 아마추어 최고의 선수들이 프로무대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링을 떠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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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방어에 성공한 동생 김지원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김지숙.


욱 하고 은퇴한 무패의 프로복서

그러나 김지원은 달랐습니다. 동물적인 동체시력과 함께 사우스포에서 품어져나오는 정교한 카운터에 웬만한 프로복서들은 접근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기술이 빼어났습니다. 신은 김지원이란 천재에게 노력이라는 재능을 주지않으셨나 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1982년 9월 필리핀 원정경기에서 넵탈리 알라막이라는 복서를 상대로 적지에서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 끝에 무승부 판정이 나오자, 발끈한 서순종 세기프로모션 회장이 8개월 후 알라막을 서울로 데려와 밥상(?)을 차려줬지만 김지원은 방심하며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고, 경기도 간신히 무승부로 마무리해 서 회장을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김지원은 1983년 9월 중견복서이자 친구인 전찬중(58년생 고창)을 꺾고 한국 주니어페더급 챔피언에 오른 뒤 한달 후 리틀 반고얀(필리핀)을 제압, 동양챔피언에 오릅니다. 이어 이 타이틀을 4차방어에 성공했고, 1985년 1월 동급 IBF챔피언 서성인에게 10회 TKO승을 거두며 세계정상에 오릅니다. 서성인과는 3차방어전에서 리턴매치를 벌였는데 결과는 66초 만에 챔피언김지원의 KO승이었습니다. 김지원은 이 세계타이틀도 4차방어에 성공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은퇴와 관련한 비화를 소개해야 합니다. 4차방어전을 앞두고 훈련이 끝난 후 김지원은 친구가 운영하는 방배동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음날 신문에 세계타이틀을 앞둔 김지원의 정신상태를 질타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에 한국권투위원회가 김지원에게 엘로카드(강한 경고)를 보내자 발끈한 김지원은 4차방어가 끝나자마자 은퇴를 선언해 버립니다. 마치 과거 프로야구 LG의 감독이었던 이순철과 여가시간에 키타를 치며 노래를 즐기던 투수 이상훈의 논쟁과 흡사합니다. 야구에서도 개인사생활과 팀워크의 갈림길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이상훈이 팀을 떠났죠. 당시 김지원은 5차방어전이 폴 페라리와 거액인 6만 5,000달러(한화 5,700만 원)에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복싱과 안녕을 고합니다.

김지원은 은퇴 후 정치주먹 유지광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영화 <대명>에 4,200대1의 경쟁을 뚫고 케스팅되는 등 꾸준히 연예계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언론사의 연예 콘텐츠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김지원은 “가장 아쉬운 것은 은퇴를 하지 않고 복싱에 전념했다면 국내 최초로 3체급 석권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맞수 이승훈과 맞붙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김지원은 “승훈이와는 스파링을 여러 차례 해봤는데 서성인보다는 한 수 높은 기량이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한때 사업이 잘 진척되지 않을 때 자신을 보듬어준 후배 이경연 관장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자신의 지난 시절은 미련과 아쉬움이 점철된 과거였다고 술회했습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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