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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승진의 복싱이야기] 혼자 즐기기에 아까운 명승부 - 2017 KBF 신인왕전 관전평

지난 26일 용인대 SM복싱클럽에서 2017 KBF 신인왕전 8강전이 열렸습니다. 프로복싱 자체가 인기가 없는데, 신인들의 경기이니 사실 비인기종목의 정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대회입니다. 하지만 복싱인의 한 사람으로 이번 대회에 제법 훌륭한 선수들이 여럿 나와서, 향후 한국복싱에 대해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프로복싱 현장관람은 방송으로 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큰 차이가 납니다. 링사이드에서 관전하면 선수들의 기량뿐 아니라 표정과 숨소리까지 들으며 선수들의 심정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재미있기에 주로 운동을 해본 사람들이 관전합니다. 당연히 열성팬들은 대부분 권투인들입니다.

이번 대회 출전선수들은 기량도 뛰어났고, 경기가 박진감이 넘쳐 관중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대부분 제가 처음 보는 선수들이라 아무 선입견 없이 경기력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가장 먼저 기본기가 잘 갖춰졌는지 봅니다. 기본기가 안 된 선수를 링 위에 올려보내는 것은 불완전한 상품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진정 프로선수로 자격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 있는 펀치를 내는지를 봅니다. 복서도 사람인지라 상대의 펀치에 대한 두려움은 있습니다. 가장 힘든 선수가 내 주먹이 하나 나갈 때마다 반사적으로 펀치를 내미는 선수죠. 펀치가 들어오면 누구나 움찔하는 법인데 이를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복서의 기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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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 선수(왼쪽)와 차성민 선수의 포즈 사진. [사진=KBF]


보기 힘든 '동시다운'의 명승부

이번 대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선수는 비복싱짐의 차성민 선수와 신탄진복싱클럽의 서정우 선수입니다. 제가 처음 보는 선수인데 둘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묵직한 펀치와 화끈한 파이팅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밸런스도 좋고, 중심이동도 무리 없이 해냈습니다. 신인왕 대회지만 신인티를 벗인 관록 있는 복서로 보였습니다. 복싱스타일도 정말 흡사했는데, 시종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 있는 펀치로 맞붙었습니다. 둘 다 ‘한 방 걸리면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상대의 펀치에 즉각적으로 반격을 가해 관중을 흥분시켰습니다.

누가 헝그리복싱이라 했을까요. 이건 복싱을 안 해본 사람들이 지어낸 말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복싱 시장이 침체했어도 남자라면 강해지고 싶고 전사가 되고 싶고 또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런 열정이 그 힘든 훈련과정을 이겨내고, 상대의 펀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링 위에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죠.

경기는 3라운드에 끝났습니다. 차성민 선수의 정타에 서정우 선수가 움찔하자, 차 선수가 이를 놓치지 않고 연타를 퍼부으며 첫 번째 다운을 뺏었습니다. 차성민 선수은 순간포착 능력도 뛰어남을 보여준 것입니다. 복서에게 필요한 본능 중 하나가 바로 헌터본능입니다. 좀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사냥감을 걸어넘어뜨리면 목덜미를 물어서 숨통을 끊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즉, 이 경기를 명승부로 만든 것은 이 다음입니다. 서정우 선수가 대단한 맷집과 내구력이 보여줍니다. 그 짧은 순간 연타에도 고개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회복하며 다음 공격에 자신의 펀치를 내밀며 응수한 것이죠. 명승부는 상대 선수도 훌륭해야 하는 것처럼 서정우 선수도 참 강했습니다.

두 선수는 다시 난타전에 들어갔고 두 선수가 동시에 펀치를 가격하고 동시에 다운되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가장 정확한 위치에서 봤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하게 ‘동시 가격 동시 다운’입니다. 그리고 두 선수 바로 일어나서 심판이 말릴 틈도 없이 다시 싸웠죠. 이때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한 라운드에서 서정우 선수가 두 번째 다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선수안전을 위한 KBF 규정상 ‘한 라운드 두 번 다운’은 자동 KO패로 처리됩니다. 결국 차성민 선수의 손이 올라갑니다. 서정우 선수가 KO패를 받아들이기엔 무척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규정을 따라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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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신인 프로복서지만, 무에타이 산타 태권도 우슈 등에서 화려한 경력을 소유하고 있는 서정우 선수. [사진=신탄진복싱클럽]


이유 있는 명승부

두 선수는 누가 신인왕이 되더라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긴 차성민 선수나, 진 서정우 선수나 향후 경험과 기술을 쌓으면 훌륭한 복서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복싱 기술의 한계는 없습니다. 신체조건, 성격 그리고 트레이너의 조언까지 더해져 무한히 창조, 발전합니다.

서정우 선수의 경기 스타일을 보면 이번 패배에 굴하지 않고 더욱 발전할 것 같습니다. 경기 스타일을 보면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는데, 정신력이 참 강했습니다. 세상일도 그렇지만 복싱은 패배를 통하여 더 배우는 게 많습니다. 복싱 기술은 어쩌면 속이기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공격 방향을 감추고, 상대의 허점을 찾는 수 싸움을 계속 벌이는 것이지요. 그러니 복싱은 상대를 그냥 때리는 운동이 아니라, 안 맞고 때리는 운동입니다. 서정우 선수는 이번 패배를 경험 삼아 공격시 수비를 더욱 보완하기 바랍니다.

두 선수의 인상이 강렬했던 까닭에 나중에 좀 알아봤습니다. 두 선수 모두 알고보니 만만치 않은 기량의 소유자였습니다. 20살의 차성민은 아마경력이 좋았습니다. 전국신인대회 고등부와 서울시장배 고등부(이상 60kg급)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더군요. 고교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프로로 20대에 승부를 걸 각오랍니다.

서정우 선수는 직접 통화했는데 나이가 36세입니다. 원래 무에타이 선수로 2004년 플라이급과 밴텀급 챔피언에 차례로 올랐고, 우슈국가대표-프로태권도-산타-이종격투기 등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2017년 2월 18일 프로테스트 합격하고 이제 프로복서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입니다. 신탄진복싱체육관의 관장이기도 합니다. 잘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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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BF 신인왕전 현장에서 차성민 선수(왼쪽)가 포즈를 취했다. [사진=KBF]


복싱발전을 위해


복싱 기술의 최고봉은 상대의 스타일과 눈빛을 통해 상대 성격과 심리를 읽고, 그것을 이용해 작전을 짜는 기술입니다. 복싱에서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판단이 앞서기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표정에 다 나타납니다. 그 표정을 보고 상대를 읽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두뇌플레이이고, 이것을 잘해야 성공확률이 높습니다.

이와 관련해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다들 포먼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알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결국 한순간에 경기를 끝냈죠.

선수가 이렇게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세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선수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고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관장이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면 선수가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습니다. 경기 중 간섭도 최대한 배제하고 작전지시도 흐름을 정확히 짚어주는 한 가지만 해야 합니다. 가끔 어떤 트레이너는 링 위의 선수를 컴퓨터게임을 하듯 조정하려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날 두 선수의 세컨을 포함해, 잘 하는 선수의 관장은 경기장에서 비교적 조용하답니다.

끝으로 큰 적자를 감수하며 복서들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KBF의 이인경 회장께 감사를 표합니다.

* 글쓰이 도승진은 현직 치과의사입니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누가치과의 원장이죠. 순천향대학병원 치주과의 외래교수를 역임했습니다. 동시에 하루 한 번 복싱을 수련하는 복싱인입니다. 한국권투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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