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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골퍼’ 한정은 투어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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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은은 올 2월부터 감성에서 우러난 85편의 시를 투어 생활 중에 썼다고 한다. [사진=채승훈 기자]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골프 치는 시인’보다는 ‘시 쓰는 골프선수’가 낫겠다. 전자는 꽤 많지만 후자는 세상 처음일 것이다.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시드전을 통과한 선수들은 다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6위로 통과한 한정은(23)은 좀 특이한 이력과 캐릭터를 가졌다.

거침없던 유망주
2002년 6월 어느 날, 제주도에 살던 한정은은 초등학교 3학 때 아버지 사무실에서 박세리가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사진을 본 뒤로 골프를 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은 ‘사진을 본 순간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전까지 오전에 태권도, 오후에는 테니스와 축구를 배웠다.

둘째딸이 ‘골프를 하겠다’고 당차게 말하자 부친은 딸의 결심을 확인하고는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제주 성읍에서 시내로 이사했고, 이듬해 대표 코치인 한연희 국가대표 감독을 찾아가 자식을 맡겼다. 당시 한 감독 문하에는 김경태 등 한국의 뛰어난 선수들 38명이 있어서 실력은 금방 늘었다. 2005년 중학교 1학년 때 제16회 스포츠조선배 대회에서 첫 우승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터라 매년 우승 트로피를 챙기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한정은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주니어 상비군을 지냈고, 2008년부터 3년간 국가대표를 지냈다. 주장이던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김지희, 김현수와 함께 단체전 금메달(개인 4위)을 따내고 세계아마추어 팀 선수권에서도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우승 2관왕을 차지했다. 당시 그는 세계 아마추어 랭킹 1위였다.

주변의 넘치는 기대를 한 몸에 안고 2010년 KLPGA에 입회한 이후 2011년과 2013년 정규투어에서 활동했으나,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2012년 드림투어에서는 두 번 우승하면서 상금왕 자격으로 이듬해 1부 투어에 도전했으나 역시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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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리스트. 왼쪽부터 김현수, 김지희, 한정은.


골프를 중단하다
촉망받던 선수였기에 프로 무대에서 빨리 우승해야 한다는 욕심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이 높을수록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이 급해지고, 그건 곧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한정은은 당시 목 디스크까지 겹쳤지만 무시하고 연습으로 보충하려고만 했다. 9월말 어느 날 연습장에서 갑자기 천식이 왔다. 숨도 못 쉴 정도였고 결국 쓰러졌다. “그날 이후로 저는 응급차만 보면 긴장해요. 다시 정신을 차린 게 엠뷸런스 안이었어요.”

병원에 가보니 천식에다 왼쪽 어깨는 회전근계 파열이 되어 있었다. 이후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찬바람이라도 쐬면 호흡량이 뚝 떨어졌다. 자다가도 호흡곤란으로 바들바들 떨리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안 좋았는데 결국 천식이었다. 연습장에 가기가 두려웠다. 목 부상도 함께 왔으니 이후로 클럽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흘러 2년간 골프채를 잡지 못했다. 골프를 아예 할 수조차 없었다. 대신 학교(고려대 사회체육학과)를 열심히 다니고 동아리 활동도 했다. “사진에 관심이 많아요. 친구들과 출사나가기도 하면서 골프를 잊으려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2월에 정상 호흡이라는 수치를 확인했다. 몸도 이젠 가뿐했고, 숨이 잘 쉬어졌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다시 골프할 수 있겠다’였다. 절친인 노무라 하루에게 전화해서 당장 전지훈련 가자고 했다. 결국 태국 워터밀 골프장에 가서 한 달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클럽을 잡은 첫날 11번 홀에서 왼쪽 손바닥을 벌에 쏘였다. 3일을 누워있어야 했다. 다시 골프채를 잡고 연습을 했지만 2년간 완전히 쉬었던 터라 감각은 무뎌졌다. 예전에는 비거리하면 박성현만큼 나갔으나 한참이나 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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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은이 드림투어 1차전에서 오랜만에 우승하고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사진=KLPGA]


시 쓰는 골퍼
지난해 연습을 시작한 뒤로 실력을 차근차근 키워올렸고, 올해 2부 투어를 뛰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옛 스승 한연희 감독을 찾아가 스윙도 바로잡았다. 그러다 지난 4월 중순에는 드림투어 1차전에서 정말 오랜만에 우승을 맛봤다. 전북 군산CC에서 끝난 KLPGA 2016 군산CC컵 드림투어 1차전이었다.

욕심이 날 수도 있지만, 건강이 우선이었다. 골프를 다시 한다는 자체부터 감개무량했다. 2012년은 드림투어 상금왕으로 마쳤으나 다시 뛰는 올해 드림투어에서는 필드에 서는 것부터 그렇게 감정이 북받쳤다. 거기서 시심(詩心)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2월부터 현재까지 모두 85편의 시를 썼다. 1차전 우승 직후에 쓴 ‘성장’이라는 제목의 시다.

‘난 늘 축하받을 사람에게 한 턱 쏘라며 축하 인사하듯 말을 건넸는데 생각해보니 방법이 틀렸다. 그곳까지 가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적어도 나만큼은 고생했으니 내가 한 턱 쏠게라며 다독이는 사람이고 싶다. -성장 한장군’

‘한장군’이란 필명이 나온 건 재미있다. 중학교1학년 때 계룡산 근처 백숙집에 갔는데 그곳에 할아버지가 그를 보더니 자갈밭에서 넙죽 엎드려 갑자기 ‘장군님 왜 이제 오셨냐’고 큰 절을 했다고 한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린 나이에 장군이 되었는데 일찍 죽은 혼령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생겨난 별명이 한 장군이다.

‘지나온 화려했던 과거를 더 밟게 빛내라고 이런 시련이 찾아왔나봐. 목표- 한장군’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하다가 좌절을 맛본 이가 쓸 수 있는 ‘목표’라는 시다. “저만의 취미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내 생각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고요. 그렇게 갑자기 시가 떠올라서 쓰게 됐습니다.”

골프채를 놓고 잘나가던 친구들을 바라보고 동경만 하던 2년이란 공백기에 한정은은 더 성숙해지고 감성도 풍부해졌다. 2부투어에서 상금 13위를 하고 시드전을 치렀다. 이제는 골프 대회를 앞두고 시를 쓴다. 두 번가기 싫어한다는 시드전을 앞둔 전날 밤에 잠이 안와서 뒤척이다가 지은 ‘부모님’이란 시를 지었을 때는 눈물이 났다.

‘딸아 네가 나의 별이라면 나는 네가 언제나 환하게 빛날 수 있는 밤이 되어주고 싶구나.- 부모님 한장군’

한정은은 내년 투어에서는 건강하게 시즌을 마치는 게 꿈이다. 겨울 전지훈련에서는 그래서 체력 관리에 중점을 둘 생각이다. 2년 공백기 탓인지 줄어든 비거리를 예전만큼 늘리는 것도 목표다. 그렇게 말하고 웃는 모습을 보니 박성현을 많이 닮았다,

“중학교 때부터 닮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올해 성현이가 우승할 때마다 지나가다가 축하 인사를 정말 많이 받았죠. 그래서 성현이한테 ‘너 때문에 언니 힘들다’고 장난처럼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박성현이 부럽다. 옛날을 생각하면 말이다. “성현이나 하루는 두 선수가 체력관리를 정말 잘한다는 것이다. 대회가 끝나는 날에도 운동을 한다.” 하지만 아직 박성현이나 노무라 하루가 가보지 못한 그만의 길이 있다. 시 쓰는 프로골퍼다. 그건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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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시기를 견뎌낸 한정은은 내년 투어에서는 건강하게 투어를 무사히 마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사진=채승훈 기자]


한정은 프로필
생년월일: 93.3.26일생(23세) 제주도
투어데뷔: 2010년 11월
신장: 169cm
전적: 2005~07 국가대표 상비군, 08~10 국가대표
2005년 박카스배 전국학생골프대회 단체전 우승
2006년 제주 도지사배 주니어 학생 선수권 우승
2007년 전국학생 골프 팀선수권 우승
2009년 일송배 제27회 주니어선수권 우승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개인 4위), 세계아마추어 팀 선수권 우승
2012년 2부투어 상금왕
2011, 2013년 1부 투어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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