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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로 보는 축구, 재미있습니까? - 이준석의 킥 더 무비<잔인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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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축구 클레이메이션 단편영화

여러분은 ‘클레이메이션(claymation)’을 아시나요? 클레이메이션은 점토로 빚은 인형이나 사물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대표작으로는 <월레스와 그로밋(Wallace and Gromit)>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클레이메이션을 한 번 촬영하려면 엄청난 정성이 들어간다고 하네요. 아시다시피 영화의 원리는 조금씩 다른 장면을 연속해서 빨리 보여주면 눈의 잔상효과 때문에 사물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컴퓨터그래픽 없이 순수한 클레이메이션을 촬영하려면 일일이 점토로 조금씩 다른 동작을 만들어가면서 촬영해야 한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봐도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갈 지 알 수 있습니다.

<잔인한 게임(Muzne HRY: Virile Games)>은 이런 클레이메이션의 기법이 들어간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축구선수들의 얼굴이 갖가지 방법으로 망가지는 것을 점토를 이용해 표현했군요. 비록 월레스와 그로밋처럼 일일이 다른 동작을 만들어 연결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망가지는 사람 얼굴의 개수가 굉장히 많은데 그걸 일일이 제작했다고 생각하니 대단하네요.

그런데 왜 축구선수들의 얼굴이 망가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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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방송의 발달이 축구팬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단편 영화답게 굉장히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럽의 어느 좁은 집, 30~40대로 추정되는 남자가 집에서 TV로 축구를 봅니다. 여느 유럽의 아저씨처럼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소파에 앉아 과자를 먹으며 브라운관에 펼쳐지는 치열한 경기를 감상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영화의 배경은 요즘인데, TV 속 경기장의 모습은 1900년대 초반의 초창기 축구장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것 같은 모자와 낡은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빼곡히 들어찬 경기장, 하지만 정작 필드에는 마치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2차원 평면의 선수와 주심들이 경기를 펼칩니다.

기괴한 장면은 계속됩니다. 가만히 보니 주심과 양 팀 선수들의 얼굴이 모두 TV를 보는 남자의 얼굴과 똑같습니다. 게다가 경기도 상대 골대에 골을 넣는 게 아니라 두 팀의 선수들이 서로의 얼굴을 짓뭉개버리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망치로 때리거나, 가위로 자르거나, 약물 주사를 넣거나, 와인 따개로 엉망을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상대 선수들의 얼굴을 만신창이로 만듭니다.

무표정하게 축구 경기를 보는 남자. 간혹 하프타임 때 정상적인 프로그램이 나오지만 남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후반전 막바지에 이르자 경기는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리고 TV 속 경기장에는 1900년대의 옛날 관중들이 흥분해서 그라운드로 난입합니다. 정작 필드의 선수들은 TV를 보는 남자의 집으로 쳐들어옵니다. 그라운드의 전쟁은 이제 남자의 좁은 방 안에서 계속됩니다. 망가져버린 얼굴, 아니 점토로 가득찬 방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미디어로 인해 본질을 잃어가는 축구 문화에 대한 씁쓸함

언뜻 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실험적인 작품 같지만 이 영화에는 현대 축구와 미디어에 대한 씁쓸한 고찰이 숨어 있습니다.

작품 속 TV에는 TV는커녕, 라디오도 신기하던 옛 시절, 축구를 보기 위해 몰래 경기장 벽을 기어오르던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최첨단의 경기장도, 안락한 좌석도, 그리고 안방으로 축구 경기를 구석구석 전해주는 중계방송도 없던 시절이지만 그 시절 관중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과 설렘이 넘쳐납니다.

반면 좁은 방 안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맥주와 과자를 먹으며 축구를 보는 주인공의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입니다. 과거의 불편하기만 했던 축구 관람이 요즘의 안락한 TV시청보다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는 건 아이러니하지요.

이런 대비는 마치 픽사(Pixar)의 애니메이션 <카(Cars)>의 주제를 생각나게 합니다. <카>에는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황폐화된 미국 시골 마을이 나옵니다. 산을 깎고, 고가도로로 계곡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사람들은 산과 계곡을 피해 구불구불하게 난 길들을 따라 여행을 했습니다.

<카>의 여주인공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옛날에는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 자체가 여행이었다.” 드라이브 자체가 즐거움이었던 옛날과 달리 요즘은 고속도로를 달려 단지 빨리 끝내야 하는 여행의 지루한 단계로 전락해 버린 것이지요. 문명의 발전이 결코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잔인한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굳이 경기장까지 가지 않아도 집에서 편안하게 축구중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재미있는 축구 관람일까요?

수원 블루윙즈의 서포터로서 직접 경기장을 찾아 축구를 보는 저도 주변 사람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TV를 통해 맨유나 바르셀로나 같은 유명 클럽들의 환상적인 경기를 볼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팀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느냐?”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TV를 통해 아무 감흥 없이 경기를 그저 ‘시청’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가면 같은 얼굴, 반면 자기 팀의 경기를 보러 가 푸른 그라운드를 보며 주변의 동료 서포터들과 함께 축구를 보는 이들의 행복한 모습. 미디어의 발달이 결코 축구팬들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음을 이 영화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의 선정성이 축구를 잔인한 게임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영화의 메시지는 또 있습니다. TV 속에는 시청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양 팀의 선수들이 상대 선수들을 갖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짓뭉개 버립니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계속해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을 내보내고 있고, 점점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포털의 기사나 심지어 TV 뉴스를 봐도 연예인들의 선정적인 모습과 잔인하고 폭력적인 소재를 다룬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축구와 같은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페어플레이와 동업자 정신에 기초한 선의의 경쟁이 축구의 기본 가치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축구 언론에는 각종 스타 선수들의 천문학적 연봉과 사생활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라운드에서는 오직 승리만을 추구하기 위해 페어플레이를 내던지는 선수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서로의 얼굴을 짓뭉개기에 혈안이 된 선수들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세태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청자의 얼굴과 선수의 얼굴이 같다는 설정은 결국 축구 중계 시청자들이 선수들을 마치 자신과 같다고 여기는 ‘감정이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물론 축구 서포터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TV가 시청자들의 얼굴을 한 선수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디어가 축구 본연의 가치와는 다른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갈등을 부추기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선수들이 TV 밖으로 나와서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디어가 축구를 매개로 조장하는 폭력이 실제 경기장 밖의 사회에서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사실, 유럽이나 남미의 훌리건 난동은 이미 일상화된 일이지요. 이러한 난동에 미디어가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축구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

독립 영화는 짧은 상영 시간에 비해 언제나 많은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의 힘이 아닐까요?

10여 분 남짓한 축구 단편영화 <잔인한 게임>. 하지만 우리는 이 작품 속에서 축구 관람이 주는 행복을 빼앗고, 페어플레이가 아닌 극단적 대결을 부추기는 스포츠 미디어의 행태를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미디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다만, 저와 여러분 같은 축구팬 시청자들이 미디어의 부작용을 잘 알고, 현명하게 대응하는 것. 그게 감독이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 아닐까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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