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축구,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만화의 나라입니다. 일본어로 만화를 뜻하는 ‘망가(まんが, manga)’는 이제 구미 사회에서도 고유 명사로 쓰일 정도죠. 예전 도쿄에 놀라갔을 때,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의 천국이라는 아키하바라(秋葉原)를 간 적이 있습니다. 체크남방에 배낭을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오타쿠들의 물결이야 예상했던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많다는 게 재미있더군요.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아키하바라의 문화는 그 자체로도 관광 상품이 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참고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각국의 이미지를 축구공으로 표현한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축구공은 만화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비록 최근 들어 성장세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아시아의 강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인지 야구의 나라로 불리던 일본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도 많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특히 축구를 다룬 일본 만화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캡틴 츠바사’를 비롯해 ‘판타지스타’, ‘휘슬’, ‘필드 오브 드림’ 등등. 모든 일본 축구 만화를 다 다루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 중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은 <자이언트 킬링(Giant killing)>입니다.
이전까지의 일본 축구 만화들은 대개 선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드래곤볼’, ‘원피스’로 대표되는 일본 소년 만화물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곤 했지요. 즉, 잠재력이 큰 어느 선수가 계속 강한 상대들을 이겨 나가면서 성장해 가는 스토리이지요.
반면 이 만화 <자이언트 킬링>은 색다른 구성을 보입니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약팀이 강팀(자이언트 ; 거인)을 쓰러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게다가 주인공은 선수가 아니라 감독입니다.
축구는 여러 스포츠 종목 중 감독의 역할이 가장 제한된 종목에 속합니다. 경기 중에 감독이 교체할 수 있는 선수는 단 3명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작전 시간도 하프 타임이 유일하죠. 경기 중에 감독이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기 위해서는 교체 선수를 통해 전하거나 반칙으로 잠깐 중단되었을 때 이야기하는 게 전부입니다. 이런 것만 놓고 본다면 축구 승패에 감독이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축구는 감독의 역량이 가장 빛을 발하는 종목 중 하나입니다. 우선 신체 부위 중 가장 섬세함이 떨어지는 발을 이용하는데다가 그라운드도 넓기에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경기장의 모든 곳을 담당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신체 조건이나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라도 잘 조직된 약팀에게 패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결국 무명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도 훌륭한 감독을 만나면 강팀을 꺾을 수가 있지요.
이 만화도 그러한 관점에서 축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존의 축구 만화와 달리 경기 장면보다 훈련 장면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선수들이 경기 중에 플레이하는 모습보다 경기 전에 감독 또는 다른 선수들과 의견 충돌을 벌이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오죠.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힘겹게 강한 상대를 이기고 성장해서 또 다른 강한 상대와 싸우는 모습은 이 만화에 없습니다. 팀을 처음 맡은 감독이 선수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며 연패를 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야 강팀을 꺾는 내용입니다.
클럽 축구의 분위기를 가장 사실적으로 그린 애니메이션
이 작품 <자이언트 킬링>은 약팀 감독의 입장에서 축구를 그렸다는 것 외에도 주목할 만한 점이 많습니다. 바로 클럽 축구(프로 축구)의 분위기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 ‘축구왕 슛돌이(원제: 타올라라! 톱 스트라이커 燃えろ!トップストライカ?)’라는 만화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나름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이 만화는 아무래도 현실성이 많이 떨어졌죠. 특히 청소년 축구 대회임에도 거대한 경기장에 관중이 가득 찬 장면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축구 만화들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실제 축구장의 모습이나 분위기를 과장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80년대 절정인 인기를 구가했던 '축구왕 슛돌이'
그러나 자이언트 킬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공 팀의 경기장은 리그 하위를 달리는 경기장답게 서포터석을 제외하고는 관중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경기장도 거대한 경기장이 아닌, 그저 1~2만 명만 수용할 수 있는 별 개성 없는 작은 경기장이지요. 이런 형태의 경기장은 일본 J리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경기장입니다. 가시와 레이솔이나 쥬빌로 이와타의 경기장과 흡사하지요.
과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 외에도 현실성을 살린 부분은 넘쳐납니다. 우선 서포터들의 모습입니다. 기존 축구 만화에서 관중석의 관중들은 그저 ‘많다’라는 느낌만 들게 처리되고, 애매한 함성 소리나 들리는 게 고작이었죠. 하지만 <자이언트 킬링>에서는 유니폼을 입고 머플러를 두른 서포터들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또한 서포터들이 부르는 서포팅곡(응원가)도 실제 축구 경기장에서 쓰이는 응원가들의 멜로디를 그대로 차용했죠.
이 애니메이션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최강팀 오사카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실제 축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입니다. 빅매치를 앞두고 스타디움으로 걸어가는 축구팬의 모습. 그리고 경기장 밖에서부터 아련히 들리는 축구장의 설레는 함성. 경기 시작 전 전광판에 소개되는 출전 선수 소개. 그리고 그 소개에 맞춰 해당 선수의 이름을 일일이 연호하는 서포터들. 선수가 입장할 때 머플러를 치켜들고 입장곡을 부르는 서포터들. 이 모습은 우리 K리그를 포함하여 전 세계 어느 축구장을 가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을 보다 보니 문득 가슴이 설레 축구장에 가고 싶을 정도더군요. 완벽함과 세밀함을 추구하는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훌륭한 축구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낸 것 같아 감탄스럽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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