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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너희를 이길 수 있어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댐드 유나이티드>

리즈 시절?

최근에 인터넷에서 쓰이는 은어들 중에는 축구에서 유래된 것들도 있어 흥미롭습니다. ‘레알(정말이야)?’이라는 말은 레알 마드리드의 팀 명칭에서 비롯했습니다. 스페인어로 ‘황실’을 뜻하는 ‘real’을 영어식으로 ‘리얼’이 아닌 ‘레알’로 읽는 데서 착안한 은어입니다.

비슷한 말로 ‘리즈 시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요? ‘리즈 시절’은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리즈’란 바로 잉글랜드의 축구팀, 리즈 유나이티드(Leeds United)를 말합니다. 아마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한때’ 잘 나가던 팀이거든요.

리즈 유나이티드는 1970~199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2000/01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이라는 성적을 달성한 이후, 무리한 선수 영입과 경제 위기로 추락을 거듭해 지금은 하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팀입니다. 한때는 유럽에서 4등 안에 들던 팀이 이제는 잉글랜드에서도 하부 리그를 전전하다니.

리즈 유나이티드와 비슷한 팀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라는 팀입니다. 이 팀은 1978/79, 1979/80 두 시즌 연속으로 오늘날 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팀입니다. 하지만 리즈와 마찬가지로 추락을 거듭해 지금은 하부 리그 신세지요.

한때는 유럽을 호령하던 리즈와 노팅엄. 옛날에는 요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바르셀로나 급의 구단이었는데 구단 운영과 경제적인 이유로 지금은 하부 리그를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세월무상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두 팀이 한창 전성기일 때, 이 두 팀 모두의 감독을 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감독은 리즈를 너무나 증오하고 싫어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결국엔 리즈의 감독 자리까지 가게 되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쫓겨납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노팅엄을 이끌고 앞서 언급했듯이 2년 연속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아니, 사실은 감독 혼자가 아닙니다. 감독과 함께 코치 역할을 같이 수행했던 어느 콤비의 업적이지요. 바로 브라이언 클러프(Brian Howard Clough)와 피터 테일러(Peter Taylor) 콤비입니다.

중소도시의 무명팀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휩쓴 것도 모자라 2년 연속으로 유럽을 재패했던 브라이언-피터 콤비. 이 명콤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댐드 유나이티드(Damned United)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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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레비를 증오한 브라이언 클러프, 브라이언 클러프를 도와 준 피터 테일러

영화는 브라이언-피터 콤비가 유명해지기 전, 지방 도시의 무명팀인 더비 카운티(Derby County FC)의 감독을 맡았던 시절에서 시작합니다. 3부 리그의 별 볼 일없는 팀이었던 더비는 FA컵 추첨을 통해 당시 우승을 휩쓸던 강팀 리즈와 맞붙게 됩니다. 당시 리즈에는 지금의 알렉스 퍼거슨(Alex Furguson)처럼 칭송을 받던 감독 돈 레비(Donald George Revie)가 있었죠.

돈 레비와 리즈 유나이티드를 존경하던 브라이언 클러프는 경기장에서 악수를 청하지만 돈 레비는 무성의하게 브라이언 클러프를 지나쳐버립니다. 잉글랜드 최고의 인기팀이던 리즈의 감독에게, 3부 리그의 보잘 것 없는 팀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무시를 당한 브라이언 클러프는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의 단짝인 피터 테일러는 복수심에 불타는 브라이언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친구이자 동료인 브라이언을 도와 좋은 선수를 발굴해 냅니다. 피터 테일러는 무명이지만 뛰어난 가능성을 가진 선수들을 기가 막히게 발굴해 내는 재능을 갖고 있었지요.

이들의 활약으로 더비 카운티는 마침내 1부 리그로 승격하고, 그것도 모자라 리즈를 몰아내고 1부 리그 우승까지 차지합니다. 하지만 돈 레비는 여전히 더비와 브라이언 클러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브라이언 클러프 역시 리즈와 돈 레비에 대한 복수심을 계속 불태웁니다. 결국 일은 터집니다.

리그 우승으로 유러피언컵에 진출한 더비, 마침내 이탈리아 인테르 밀란과의 중요한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운명이 얄궂게도 인테르 밀란과의 경기 직전에 리즈와의 국내 리그 경기가 잡힙니다. 더비의 구단주는 인테르 밀란과의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리즈와의 경기에 후보 선수들을 내세울 것을 브라이언에게 요구합니다. 하지만 리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브라이언은 리즈 전에 주전 선수들을 대거 투입하며 총력전을 펼칩니다.

돈 레비는 이런 더비 카운티의 상황을 이용합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 더비의 선수들이 몸을 사릴 것을 예상하여 거친 경기를 펼치죠. 그 결과 더비의 주요 선수들이 부상을 당합니다. 결국 인테르 밀란과의 경기에서도 참패를 하죠. 이 일로 브라이언 클러프는 더비 카운티에서 쫓겨납니다. 그의 절친한 동료 피터 테일러와 함께요.

피터는 브라이언이 리즈와 돈 레비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며 충고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새로운 팀을 키우자고 제안합니다. 한편, 돈 레비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 됩니다. 그러자 리즈의 감독 자리가 비게 되죠. 리즈는 브라이언에게 감독 자리를 제안합니다. 돈 레비에 대한 경쟁의식에 사로 잡혀 있던 브라이언은 피터의 반대를 무릅쓰고 리즈의 감독 자리를 승낙합니다. 이에 반발한 피터는 브라이언에게 결별 선언을 합니다. 평생을 같이 해 온 브라이언과 피터 콤비.

이제 브라이언은 그토록 증오하던 리즈의 감독 자리에 홀로 부임합니다. 그리고는 돈 레비 감독을 비난하면서 이전까지의 리즈가 거칠고 잘못된 축구를 해 왔다고 말하며 팀을 뜯어고치려 합니다.

돈 레비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하던 리즈 선수들은 브라이언에게 반발합니다. 결국 팀은 부진에 빠지고 브라이언은 비웃음 속에 쫓겨납니다. 쫓겨나던 날, 돈 레비와 브라이언 클러프는 TV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해서 설전을 벌입니다. 여전히 브라이언을 형편없는 감독 취급하는 돈 레비. 오만한 돈 레비 감독에게 망신을 당한 브라이언 클러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 1년 후에 봅시다. 아니, 5년 후에 어떻게 될지 봅시다.”
과연 브라이언은 복수에 성공할까요? 그리고 피터와 화해를 할 수 있을까요?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위대한 감독이 된 브라이언 클러프, 초라한 감독이 된 돈 레비

브라이언 클러프와 피터 테일러. 이 콤비는 이후 지방 도시의 별 볼 일 없던 팀인 노팅엄 포레스트를 맡습니다. 그리고는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잉글랜드리그 우승. 유러피언컵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합니다. 반면 브라이언 클러프를 그렇게도 무시하던 돈 레비는 초라한 처지가 됩니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 된 이후 최악의 부진을 거듭합니다. 유럽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모두 예선탈락해서 본선 무대조차 밟지 못하는 망신을 당합니다. 이후 아랍에미리트 같은 중동팀을 전전하면서 감독으로서 초라한 말년을 보냅니다. 한때 저 위에서 브라이언 클러프를 얕잡아 보던, 위대한 리즈 유나이티드의 돈 레비 감독. 하지만 상황은 역전된 것이죠. 오늘날 잉글랜드에서는 브라이언 클러프를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하지만 돈 레비는 그 존재감이 크지 않다고 합니다. 정말 인생사 새옹지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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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개인이라도 좋은 팀을 이기기는 힘들다


지금까지 축구 영화에서는 주로 선수들 간의 단결이나 화합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특이하게도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의 협력을 이야기하고 있죠.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던 돈 레비와 브라이언 클러프. 모두 다 뛰어난 감독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 레비에게는 피터 테일러 같은 좋은 조력자가 없었지요. 다행히 브라이언은 실패를 한 이후, 비참한 신세가 되면서 동료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영화 <골>에서 동료에게 패스하지 않고 혼자서만 축구를 하려는 주인공에게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등에 쓰여 있는 너의 이름보다 네 가슴에 새겨진 팀의 이름이 더 소중하다.’

돈 레비에게는 없었지만 브라이언과 피터 콤비에게는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좋은 동료와 팀워크였습니다. 스포츠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인 협동과 우정은 감독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특히 축구는 다루기 힘든 발과 머리로만 하는 운동이기에 동료 간의 협력이 특히 강조되는 스포츠입니다. 육상이나 농구처럼 신체적 조건이 성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종목과 달리 축구의 세계에서는 신체적 조건이 딸리는 팀들이 조직력으로 강팀을 이기는 결과가 드물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못 이기지만 우리가 뭉치면 너희를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이 감독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덧붙여: 이 영화의 제목이 참 절묘합니다. ‘댐드 유나이티드(Damned United)’. 즉 ‘빌어먹을 유나이티드(연합)’이라는 뜻인데요. 영화에서 브라이언 클러프가 유난히도 증오했던 리즈 유나이티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겠고, 또는 리즈를 타도하기 위해 뭉친 브라이언과 피터의 연합을 재미있게 표현한 말일 수도 있겠네요. 사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코치진이나 선수들 간의 비화들이 많을 텐데 그런 것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축구 종주국의 축구 문화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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